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혼자 살아요>라는 곡을 참 좋아한다. 한국 인디밴드 씬에 한참 빠져있을 무렵 스포티파이의 추천으로 우연히 알게 된 이 밴드의 노래에는 정말 재치 있고 솔직한 가사들이 참 많은데, 이 중 <혼자 살아요>라는 곡은 특히 후렴구의 가사가 인상 깊다. "누구나 혼자, 인생 혼자 살아요." 심플하다. 가사만 읽어보면 점차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사회에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단편적인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이 노래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여럿이서 다 같이, 우린 서로 혼자 산다고 행복하게 노래 부르며 곡은 끝이 난다. 얼마나 아이러니하면서도 간단명료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메시지인가. 각자를 독립된 자아로서 존중하는 동시에 공생을 도모하는, 각자 다른 톤의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멋진 노래가 되는 것. 참 멋진 일이고, 성숙한 아이디어다.
여기에 장문의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모두 그랬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 타인은, 지옥까진 아니지만, 나에겐 확실히 어려운 존재다. 다들 사람이 제일 어렵다고 하는데, 글쎄, 내가 볼 때엔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혹은 잘 어울리려 노력하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주고, 받아준다. 나도 물론 타인이 이렇게 성의를 보여온다면 최대한 그 정성을 받아주려 하는 편이지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거나 감정선을 이어가고 싶은 날에는 굉장한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럴 때에는 성의인 것을 앎에도 스트레스를 꽤나 받는 편이다. 성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의 이런 생각을 구구절절 풀어서 이야기한들 이해는커녕 들어줄 사람은 지금까지 나와 연인 관계였던 사람들 외에는 본 적이 없다. 결국 나는 이렇게 오해의 늪에 빠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마는 것이다.
가끔은 사람을 힘들어하는 나조차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힘든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사람에게 나를 투영하며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나도 이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내가 사람을 줄곧 어려워해 왔던 이유는 매사에 걱정이 너무 많거나, 낮은 자존감이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으로써 온전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니, 주변에 친구가 많아 보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웃으며 잘 지내는 사람에게 나도 친한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미성숙하고 어리지만, 순도 100%의 사회적 욕구다. 이것이 너무 심하여 결핍 증상을 보인다면 그것은 마음의 병이니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이는 우리가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성적으로 자연스레 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동물의 본능일 테다. 이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인정하고 흘려보내며 너무 자책하지 않는 편이다.
요즘은 혼자가 편하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다만 실제로 혼자이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혼자가 편하더라도, 나의 가치관과 취미를 공유하고 편하게 웃고 떠들며 서로 의지하고 온기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귀중한 파트너 한 명을 거부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들 외롭지만, 그 외로움보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더 크기에 함부로 인간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복잡한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닐까. 사람을 원하되 사람이 두려운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누군가가 마법처럼 다가와 줄 확률은 매우 낮다. 혹여 정말 큰 용기를 내어 당사자가 직접 이런 백마 탄 왕자님이나 공주님을 찾아 나선다 해도,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일 것이다. 바늘을 찾는 동안 아무 일도 없다면 천만다행이다. 사회와 같이 위험이 공존하는 모래사장에는 항상 날카로운 조개껍질이 널브러져 있기 마련이다. 상처 난 발에 새 살이 돋아 바늘을 찾기 위해 모래사장을 다시 헤맬 용기를 되찾기까지는 사람에 따라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결국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와 마찬가로 타인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기르는 것일 테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혼자들이다. 이 혼자들은 모두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이는 불변의 법칙이다. 최근 작성한 영화 한줄평 중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 오른쪽에서 보면 왼쪽'이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사람은 서있는 위치에 따라 같은 곳을 보더라도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결국 우리가 본 그 무언가는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인데, 우리가 처한 현실과 상황에 입각하여 그 물건의 위치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만약 두 사람이 이 물건은 왼쪽에 있다, 오른쪽에 있다며 서로의 말만 맞다고 싸우기 시작한다면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문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타인과 다투게 되는 일 중 위 상황에 해당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자. 왼쪽에 있는 사람은 모든 상황을 왼쪽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다. 평생을 왼쪽이라는 환경에서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이 둘을 신경 쓰지 않고 존재한다. 이 두 사람이 싸움을 멈추려면 결국 서로의 위치에서 생각을 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 예의, 배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미덕이다. 미덕美德은 아름다운 덕행을 뜻한다. 덕행이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문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그 옛날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위 세 가지의 미덕보다 더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겠지만, 이 세 가지를 기반으로 둔다면 관계를 맺음에 있어 분명 실보다 득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 갈라치고, 따돌리며, 약자가 배척당하고 강자가 승리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의 왕국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도 물론 동물에 해당하고, 도시는 자주 정글에 비유되곤 한다. 그렇기에 약육강식의 법칙은 분명 인간들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성숙한 생각보다는 동물과 같이 본능에 충실한, 이성이 배제된 사고방식을 쉽게 따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학교라는 집단에서 이러한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학교폭력이나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어릴 때에 입은 상처는 남은 성인기를 포함하여 앞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장기적으로 미친다. 절대 이러한 물리적, 심리적 폭력 행위에는 동조하지 않으며 정당성이나 당위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으나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동물이던 인간이던 현실을 살아야 하며, 현실은 때로 너무 잔인하며 우리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성이 있기에 위에 언급한 존중, 예의, 배려가 아름다운 덕행이라는 것을 알며,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한 발자국씩 같이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동물의 세계였다면 약자로 분류되어 배척당하거나 버림 당했을 자들에게도, 타인과 출발점이 완전히 동등할 수는 없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한 번에 뒤집어엎을 만한 거대한 기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슬프거나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어느 무리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선뜻 식사를 제안하는 것, 소식이 뜸해져 오래 잊고 지낸 친구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 이런 사소한 것들도 모두 그 사람에게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기회를 잡는 것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만약 이런 기회조차 없다면 세상에는 '인류애'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의 깊은 상처나 사회의 차가운 실태에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을 지닌 혼자들에게, 나는 수동적으로 기회를 기다리기보다는 능동적으로 기회를 찾아 나서도록 말을 전하고 싶다. 나 또한 정말 오래도록 외로움과 따돌림에 시달렸지만, 좋은 책들을 통해 형성한 가치관을 토대로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들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물론 힘들었다. 가끔 손에 힘이 빠지기도 했고, 이 기회만 놓으면 몸도 마음도 편해질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이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사람들과 사랑을 포함하여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모든 추억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고 그 과정에서 또 아픔을 겪게 될 테지만, 핵심은 이 모든 행동과 의사판단의 주체가 나였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성숙해져야 하는 만큼 내가 이러한 기회들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도록 성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진정으로 값진 일이 될 테니까.
위에서 모래사장 속 바늘 찾기에 대한 비유를 들었다. 모래사장에는 부드러운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조개껍질들도 같이 있으며, 그로 인해 입은 상처가 아물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야 하는 삶이다. 우리는 모두 모래사장 위를 걷고 있는 혼자들이며, 어렵게 찾아낸 바늘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다. 다시 바늘을 찾아야 할 때가 온다면,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자신의 흉터 투성이 발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깨닫길 바란다. 우리가 정말로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바늘이 아니라, 모래사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발에 상처가 나더라도 다음 발걸음을 디딜 수 있도록 치유하고 성장해 가는 그 과정 자체임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바늘은, 나의 발에 남은 흉터와 상대방의 발에 남은 흉터를 모두 마주하고도 서로의 발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그 애틋한 사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