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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상공유(23)

by 이음

1년의 프로젝트가 끝나갈 무렵, 예상보다 앞당겨 인사 통보를 받았다. 예상했고 시원한 마무리인데, 처음엔 무척 당황했던 것이.. 부서가 예상했던 부서가 아니었다. 물론 남들이 선호하는 부서로 배려를 받았다(는 것은 알았다). 인사가 연휴 이후일줄 알고 마일리지로 비행기 티켓을 끊어놨는데.. 새 부장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떠난 치앙마이ㅡ. (찜찜함을 안고...)

가서 요가해야지, 말고는 그렇게 큰 기대도 계획도 없었는데. 안 왔으면 어쩔 뻔, 싶은 정도로 좋았다. 그냥 요가하고 원데이 투어하고. 맥주랑 화이트 와인을 홀짝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날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트레킹 날에는 감사하게도 비도 잘 참아주었다. 마지막날 우연히 들른 싱잉볼 가게에선 마음에 꼭 드는 싱잉볼도 구입했다. (긴 맥놀임, F코드, 닿자마자 울리는 러빙..)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싱잉볼이 나를 선택한다는 네팔 출신 가게 사장님과의 대화도 의미있었다. 알찬 사흘. 그 사이 내 마음은 진정돼 갔다.


가져간 책마저 지금 딱 좋았다.


'선생님이 중얼거렸다는 괜.찮.다.괜.찮.다.....라는 말. 의지할 건 그 말뿐이라 끊임없이 중얼거리셨다는 괜.찮.다라는 말. 그때 피식 웃으며 괜찮다고 중얼거려서 정말 괜찮아지면 이 세상에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라고 토를 다는 저를 선생님은 물끄러미 보더니 괜.찮.다라는 말을 하게 되기까지 다른 말들을 수없이 되뇌었지, 하셨지요. 수년이 지난 후에야 선생님이 괜.찮.다라는 말에 이르기 전에 마주했을 말들과 저 스스로 마주쳤습니다.'


'지금 처음 해보는 일이나 처음 당해보는 일 앞에 처하게 되면 제 나이를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물끄럼해집니다. 아직도 처음인 게 남아있다니 싶어서요. 도대체 얼마큼 더 살아야 처음 닥치는 일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요. 누구에게나 죽음을 앞둔 일초 전도 처음 처하게 되는 순간일 테...'

(신경숙 '작별 곁에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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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가 되기만 하면, 내면으로부터 너에게 명령되는 무엇인가를 네가 해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내 의지가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기회를 포착한 거지."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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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를 볼 기회가 있었다. 기네스 펠트로 주연인데 지하철을 탔을 경우, 놓쳤을 경우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에 대한 얘기였다. 작은 변수 하나로 크게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종국에 가선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큰 흐름에서 인생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였다. 댓글 중에, "그러니 과거의 선택에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에 갈 부서는 내가 예전 인사에서 한번 피하려 했던 부서였다. 그 부서 자체가 싫다기보다 당시 인사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지만 그때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는 시점에, 다시 결국 이 부서에 오게 됐다. 어차피 와야 하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에선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요가 수업도 다채롭게 들었다. 로켓1(아쉬탕가 변형), 하타빈야사, 싱잉볼 사우드베스... 심심할까봐 아경 투어(도이 수텝, 왓우몽)와 원데이 트레킹(도이 인타논) 투어도 신청했는데, 이 일정 역시 너무 만족스러웠다. 도이인타논 트레킹 날엔 우기라 비 예보가 있었는데, 비는 끝날 때까지 잘 참아주었다. 처음엔 침묵 수행처럼 아무도 말이 없었다. 숲길에선 숨소리, 새 소리만 들렸고 오히려 흐린 날씨가 숲의 신비를 더했다. 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에 가슴이 탁 트였다. 내려오는 길에는 동행한 외국인들과 조금씩 재잘거리기도.


도착 후 호텔 앞에서 와인 한 잔 하는데, 지붕을 매섭게 때리는 비가 쏟아졌다. 그 장면이, 그 분위기가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감사하다, 감사하다,감사하다.를 계속 외치는 날이었다. 회사 걱정, 새 부서 걱정도 기우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흐름은 감사하게도 나를 알맞은 곳으로, 필요한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공부하고 충만해지는, 날들이리라... 이렇게 하루, 일주일, 한 달, 3개월, 1년... 또 잘 지내보자.

감사하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도이인타논 국립공원 트레킹. 마치고 화이트 와인 한 잔 하는데, 그제야 무섭게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 그 순간 비는 운치를 더해주는지라.. 참 마법같은 감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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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처음 일행에게 입을 열었다. 서로 사진 찍어주기. 크게 웃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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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방문한 요가원. 아쉬탕가 변형 '로켓'이라는 요가인데 중간중간 (무려) 핸드스탠드가 들어가는...난이도가 좀 있는 수련이었다. 속도는 빠르나 베이스는 아쉬탕가라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재밌는 수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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