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움..
어제 영화 두 편을 보고 새벽 한 시가 넘어 잠을 청했다. 당연히 늦잠을 잤고 아침 산책을 거르고 말았다. 요즘은 오후에 걷는 것이 조금 더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오후의 공기는 아침만큼 상쾌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답답함과 자외선 강한 햇빛이 부담스러운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 허리도 그렇고 칼로리 소비를 어느 정도는 해야 부담이 덜 하니까.
그래, 그늘막의 계절이 다시 다가왔다. 더위는 짜증스럽지만 반팔과 반바지의 계절이라는 것은 굉장히 반갑다. 대충,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고 그 가벼움의 편안함이 정말 좋다. 다른 계절이라고 특별하게 차려입는 성격은 아니지만 여름만큼 아무 생각 없이 걸치고 다녀도 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지 않던가. 아무튼 조금 이른 감이 있을지라도 내일부터 그리 입고 다닐 생각이다. 남의 시선 따위 관심 없다.
모처럼 조금 더 걸었다. 이 직선 도로의 중간 정도에서 항상 우회전하는데 끝까지 가 본다. 이런 코스로 사무실에 출근하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약간 부담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예전에는 자주 걷던 길이었다. 그런데 1층 상가 중 몇몇 곳들은 문을 닫은 모습이 보인다. 비단 이 길뿐만 아니라 공실이 자주 보이는 요즘이다. 커다랗게 "임대"라며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지만 쉽지 않은 듯하다.
피자 헛 가게였는데 몇 년째 저 모습이다. 올림픽 공원 앞 대로변이니 임대료가 만만치 않아서 그런지 조금씩 더 시간의 흔적이 쌓여가면서 흉물처럼 변해 간다. 왼쪽 끄트머리의 낙서는 언제부터 있었지? 소심하게 끄적거렸네. 좀 더 과감하게, 컬러풀하게 그려 넣었으면 어땠을까? 남의 건물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한다. 임차가 쉽지 않은 주인 입장에서는 꽤나 속상한 일일 텐데 말이다.
오전 일과를 하면서 틈틈이 독서를 좀 했다. 그냥 생각나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모처럼 다시 읽었다. 오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는데 사실 당황스럽다. '내게 무슨 문제가 크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다. 도무지 남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나 감동이 눈곱만큼도 생겨나지 않으니,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난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분명 그때에는 감동을 받았었는데. 기억의 오류일까?
예전의 감상문을 남겨 두었던 사이트는 이미 없어졌고 짧은 한 줄 평은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인데 지금은 왜 이럴까? 참다운 자아를 향한 삶의 여정, 따뜻하고 짙은 감동과 깨우침이 가슴에 녹아 든다..- ★★★★☆ -2003.12.08 분명히 내가 적어 놓은 것인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물론 거의 20년 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 이건 어쩌면 공포다. 내 변화에 대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세상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느낌이라는 것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지금 한 줄 평을 굳이 남긴다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점철된, 잊어도 좋을 진부한 설교..★★ 이럴 것 같은데?! 180도 다른 평가 아니던가! 진심으로 당황스럽다.
하지만 잠깐 그러고 만다. 이 희뿌연 사회 속에서 그래도 내 삶,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으니 마음과 태도의 변화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또 10년 정도 지나 다시 읽으면 그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일 터, 많이 냉소적으로 변했구나,라는 사실만 인지하면 그만일 것이다. 억지로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가치관을 다시 만들 필요는 없다. 실망하고 피곤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마음을 써야 할 곳이 따로 있다.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네 갈 길 가렴."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벗어났을 때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간병 3년이면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제 2년 조금 못 되었으니 아직은 아니다.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길도 지금은 없다. 때가 되면 그리할 것이다.
이왕 꾸밀 화단, 형형색색의 꽃으로 수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사실 지금은 간병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좋아지신 상황에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 퇴원하셨을 때를 생각하면서 그 마음만큼은 결코 잊지 않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무리하려고 노력 중이다. 가끔씩 짜증을 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뒤돌아 서지 않을 수 있도록 은총이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또 기원한다.
아무튼 세상은 온통 녹색이다. 가장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다. 다만, 자연에서 보이는 그것은 생각보다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강한 생명력의 기운이 내게로 옮겨져 조금은 더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늘 안다고 하면서 행하지를 못한다. 그저 알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 많은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낙오까지는 아닐지라도 한없이 뒤떨어진, 지금의 나를 말이다. 다시 앞서갈 능력도 이제는 없음을 안다. 다시 만들기 힘들다는 것도 인정한다. 어쩌면 그냥 주저앉아 시간만 보내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 그 누군가를 우연히 지금 스치게 된다면,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먼저 숨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토록 소망하던 순간이 또 다른 아픔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바뀔 것이다. 아니 바꿀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하나 둘 그리고 또 하나 둘 셋..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