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다는 것
오후 6시, 며칠 전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달이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이제 막 어둠이 깔리려는 순간, 저 넓은 하늘 한 지점에서 수줍게 혹은 차분하게 잔잔한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모습.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달빛이 언제나 반갑고 감사하기까지 하다. 요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자주 바라본다.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좀 더 느끼기 위해서.
오늘은 아침 산책을 나가기 전까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겨울은 자주 이런 풍경을 선물해 주고는 한다. 젊었을 때는 가장 사랑했었던 계절이었지만 요즘은 그러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움츠려들게 되고 게을러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을 때 그 찬바람이 부담스러워진다. 정신을 맑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에 그토록 좋아했었던 것이었는데. 아쉽지만 그렇게 변해간다 마음이.
"아빠! 요즘 고민이 생겼어요."
"무슨 일인데?"
"마스크 때문에 모든 여자들이 다 예뻐 보여서 큰일인 것 같아요!"
"에라, 공부나 해라 응?"
벗의 아들이 진지하게 얘기했었다 한다. 하기야 이제 중3 인가? 그럴 나이일 테다. 우리도 그러지 않았던가? 요즘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더 일찍 왕성해질지 모르겠지만. 귀엽네, 잠시 함께 웃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마스크 때문에 하관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상이 정말 달라 보이는 것일까? 요즘은 거의 만남이 없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물론, 길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게 되지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고, 인연이 없기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을 알 수도 없으니 아무 느낌도 없다. 그래서 내 얼굴을 유심히 한 번 살펴본다. 썼다가 벗었다가.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거울을 유심히 쳐다보게 된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동안, 자세하게 내 모습을 바라본 것이.
'늙었군!' 그래 그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마음에 새겨진 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 2년 전 이맘때만 하더라도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었는데. 그 해 초여름 허리디스크 파열 이후 한꺼번에 폭삭 늙은 모양이다. 석 달 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고, 한 달 정도는 거의 누워서 지냈었는데 허벅지 근육은 사라지고 급격한 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계속 쳐다본다. 이래서야 어디 새로운 인연은 꿈조차 꿀 수 없겠네 싶어진다. 연민마저 생기려고 한다. 화장품을 바꿔볼까? 아니지, 그 정도로 되겠어? 일단, 얼굴을 한 번 레이저로 갈자! 그리고 눈 밑 지방도 제거하는 거지! 음, 이참에 점도 좀 뺄까? 이왕 마음먹은 거, 머리도 좀 심어? 비용이 제법 들겠지만, 까짓것 라면만, 특히 좋아하는 팔도 왕뚜껑, 먹고살면 되지 않겠어? 그거 하나에 1,000원도 안 하잖아!
끊임없이 유혹을 한다. 그때, "왜?"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부터 들리기 시작한다. "왜라니? 당연하잖아. 젊어 보이고 싶으니까!", "그니까 왜 젊어 보이고 싶냐고? 어디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생겼니?", "그게 아니라, 나이 들어 보이는 거 조금 그렇잖아!", "그게 어때서?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늙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네 나이처럼 보이는 건데.", "거 참, 시끄럽네. 젊어 보이면 좋지 않냐?"
결국 훈계가 이어진다. 또 다른 내 자아가 목소리를 높인다. "외모에 신경 쓸 나이는 지나지 않았니? 그런다고 멋진 만남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누가 널 자세히 바라볼지 모르다는 착각을, 아직도 하고 다니니?", "그럴 시간과 비용으로 내면을 가꾸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어? 여전히 30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네 지식, 지혜 그리고 인성 등 먼저 바꿔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지 않냐?"
"정신 차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편안한 인상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어쩌고저쩌고...", "알았어! 알았어! 안 해. 관둬 씨이." 그렇게 막을 내린다. 다행인 걸까?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고, 괜히 또 다른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으니. 속상하지만 어쩌겠는가. 포기하면서 그냥 사는 거지.
모든 것들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시기를 놓쳤다면 허황된 꿈은 버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들 바뀌는 것 하나 없다는 것, 이제는 진절머리 날 정도로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아니던가.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