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아.."
지끈.
그 느낌이 있다. 불쾌하고 찐득한. 그러나 날카로운. 그리고 묘하게 둔탁한.
둔하게 머리를 누르다가, 깊고 두꺼운 바늘을 아주 천천히 넣어 밀듯이 찌르는.
시작이구만.
두통이 시작되었다. 둔탁함에서 날카로움으로 고통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손 쓸 수가 없다. 서둘러 가방에 손을 넣어 늘 상비하고 다니는 약봉지를 꺼내서 물도 없이 급하게 입에 넣는다. 억지로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고 나면, 조금은 안심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통증의 고비를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이제 언제 아플지도 대략 예상이 가능해졌다. 두통이 일정한 주기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이제 아플 때가 되었네. 하면 서서히 찾아왔다. 괴로웠지만 그래도 대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게다가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제 때 제 때 약을 먹어서 가라앉혀서 그런 걸까. 확실한 건 병원을 다니면서부터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악마 같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괴로움이, 나를 거쳐서 내 아이에게로 간 것이다. 큰 아이가 초경을 시작하고 한참 사춘기를 겪고 있던 즈음, 찌르는 듯한 두통을 호소했다. 시판 두통약이 점점 소용이 없어졌고, 나는 불안했다. 결국 내가 다니는 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대기하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다양한 연령층이 보였다. 개중에는 우리 큰아이와 비슷한 청소년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만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내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아이의 상태를 말씀드리자,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통은 모계유전입니다
학교 다녀오면 바닥에 이불을 깔고 끙끙 앓으며 누워계시는 엄마 모습이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 아 그랬구나.
아이는 뇌혈류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편두통 판정을 받았다. 병원을 나오는데 마음이 아릿아릿 저려왔다. 20대부터 시작된 두통으로 인한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순두부같이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 아이인지, 어른인지 애매한 엉성한 모습으로 서있는 아직 완성되기 전의 미숙한 모습. 손목은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이 가늘고, 얼굴에는 솜털이 뽀송뽀송하다.
어쩔꼬.. 이를 어쩌나..
이 여린 복숭아 같은 아이가 과연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내가 있다.
수많은 시간을 두통과 엉겨 싸우던 내 과거가 있다.
승과 패로 얽힌 수많은 엄마의 기보를 살펴볼 수 있기에, 내 아이는 유리한 위치에서 이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그렇게 아팠던 거구나.
정신승리라고 해도 좋다. 나는 나와 두통의 추억을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를 부여하면, 내 지난 시간들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내 아이는 혼자서 아프지 않아도 된다. 고비고비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가 옆에서 손잡고 다정히 위로해 주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외롭지 않아도 된다. 너의 아픔을 '꾀병'이라고 여기지 않을 테니.
아이도 약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이는 약이 잘 맞지 않았다. 약의 부작용인 가슴 두근거림이 좀 힘들다고 했다. 진통제를 여럿 바꿔가며 도전해 보았더니, 한 가지 약이 잘 맞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엄마보다는 아직 좀 덜한 모양이라서. 그 약이 맞지 않으면 또 대체할 방법이 있다. 그래 그게 어디야. 방법이 있다는 게 어디야. 정말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 때,
지나치지 않고 이해해 줄 엄마가 있으니.
참 다행이다.
길고 긴 두통과의 전쟁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어느 날 대비하지 못해 다시 예전의 통증이 엄습해 왔다.
다시 벽에다가 머리를 찧고 있다가, 아, 난 이걸 기록해야겠어. 나처럼 아픈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이렇게 네 편의 두통시리즈가 탄생했다.
읽어주시느라 같이 머리 아프셨을 독자님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이렇게 해피엔딩(?)을 맞이했으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사 요청드려본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