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수 있어요!
2025년 12월 17일 오후 6시
올해 11살인 둘째의 학교는 지금 한참 학생회장 선거철이다.
우리 아이도 이번에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져, 부학생회장 후보로 등록하여 선거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에 저 도전할 거예요!"
"어, 그래! 뭐든 해봐! 멋있다 너!"
흔쾌히 허락을 했던 이유는 아이 스스로 준비를 해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경기도 오산이었다.
"내일까지 USB에 파일을 넣어서 내래요!"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
선거포스터를 만들어 담아 오라는 말이다.
"다 같이 모여서 만드는 것 아니었어?"
"네 그날 프린트 해주신대요. 선생님이."
띠용~~~~
내가 생각했던 그림하고 너무 다른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사진과 글씨를 써서 오려 붙이는 풍경을 떠올렸건만.
서둘러 캔바를 검색해 봤더니, 유료로 해야 뭐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선거 프레임으로 찾아봤더니, 꼬맹씨 왈.
"너무 진지해 보여서 싫어요."
앉아서 이런저런 포스터를 찾아봤더니 말 그대로 중구난방이다.
내가 아는 건 pop스타일의 포스터뿐이라, 꼬맹씨가 마음에 든다는 모델을 기준점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구상도, 문구도 아이의 말대로.
하지만 디자인은 부모 몫.
반만 아이가 하고, 반은 내가 하는데... 이게 맞나?
같이 후보로 나가는 다른 집 이야기를 들어봐도, 결국 포스터 제작은 부모의 몫이었다.
아이고... 결국 주말하루를 반납하고 열심히 만들어서 파일에 넣어서 보냈다.
그런데 프린트를 해 온 아이는 다른 후보들이 만든 포스터를 보고, 본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만들었던 엄마도 살짝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어찌 되었든, 아이와 의논해서 제작했다.
적극적으로 아이의 의견을 반영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다음엔 피켓이 문제였다.
그건 각자 만들어오는 거란다.
아이고 머리야~~
기한은 내일까지~~
마감은 왜 이렇게 급한 걸까~
하는 수 없이 또 주말에 피켓디자인을 해서, 동네 문구점에 파일을 들고 갔다.
큰 사이즈로 인화하니 장당 이만 원가량이 들었다.
사만 원을 들여서 피켓을 인화하니. 이번에는 인화지가 말라야 한단다.
그래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폼보드에 붙인 뒤, 위에 투명비닐을 씌워 보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의 피켓이 반으로 부러지는 꿈, 내가 만든 포스터가 유치해서 온학교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꿈,
온갖 악몽이란 악몽은 다 꾼 것 같다.
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남편과 같이 폼보드에 양면테이프를 붙였다.
"자, 낙장불입이야!!!"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마아아아아아아아... 떨린다고.
"악. 잠만 잠만!!!!"
아니나 다를까.
헉. 잘못 붙었다.
폼보드가 부러질까 봐 피켓이 찢어질까 봐 조심조심 떼어냈다.
"엄마! 제가 할게요!"
"어억..니..니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저 조막손으로 잘못 붙이면... 피켓이 날아간다.
그러면... 그러면 선거운동은 뭘로 하나. 아니 여분으로 인화를 더 할걸 그랬나!!!
"잘할 수 있어요!"
내 마음을 읽었나.
아, 그렇지. 이건 아이가 나가는 거야. 맡기자.
아이는 신중하게 아빠와 같이 호흡을 맞추더니 정확하게 폼보드에 인화지를 붙였다.
와. 너무 잘한다. 떨지도 않고 한 번에!
이후 작업은 일사천리로 무사히 마쳤다.
아이도 당연히 피켓작업에 참여했다.
셋이서 숨도 안 쉬고 한 호흡에 성공!
완성된 피켓 두 개를 세워놓고 보니
간밤에 꾸었던 악몽이 살아났다.
분명 선명하고 예쁜데, 뭔가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만든 게 마음에 드니?"
"엄마! 이미 다 프린트했어요.
모두 지나간 일이에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떠억.
니가 어른이다...
엄마가 되어가지고 애한테 불안이나 떠먹이려고 하다니... 중요한 주간인데.
내가 반성해야지 내가.
아침 일찍 학교를 가서 선거운동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선거캠프를 꾸려 각 반을 돌며 기호를 외친다.
어제는 집에 와서 연설문도 뚝딱 썼다.
어찌나 잘 썼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놈의 에미는 또 그걸 타이핑해서 GPT한테 물어본다.
그랬더니 인공지능도 잘 썼다고 한다. 그걸 보고서야 안심하는..
대 한심한 멘털...
너는 너 자신도 못 믿나!!! 아오!!!
연설문을 다시 읽어보니, 고칠 게 없다.
우리 아이는 학교를 정말 사랑하고,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단다.
연설문 어디에서도 부자연스러운 주장은 볼 수 없었고.
이기고 싶어서 뻐기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의 키를 재보았다.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있다.
포스터와 피켓을 오롯이 혼자 디자인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무척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은 뒤돌아 보지 않겠다며.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우리 둘째.
언제 저렇게 자란 걸까?
"엄마. 이번에 되든, 안 되든. 상관없어요. 저는 다음번에도 나갈 거예요!"
와. 그래. 그래.
이쯤 되면 스스로에게 다시 다그쳐야겠다.
이제 그만, 이만큼 큰 아이를 믿고 맡기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에 가는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에 취할 것 같다고 생각해 보는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