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집

'대홍수'는 재난영화가 아닙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y Wishbluee
우리 집 아파트 18층인데, 물이 넘실넘실 들어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물이 차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대홍수'. 지구 멸망의 날이다.

이 엄청난 재난 앞에 놓인 모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 대홍수 예고편을 보고 넷플릭스를 켠 시청자들의 기대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빠르게 식어간다.


*[이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시청한 지인들의 평가는 처참했다. 익히 들은 바가 있어서 나 역시도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때우려 감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영화는 꽤 몰입감이 있었고 그려내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정신 차려보니 결국 새벽 두 시, 화면에는 마지막 스탭롤이 올라가고 있었다.


홍보가 잘못됐다.

이 영화의 장르는 '재난물'이 아니라 'SF'였다.


잠에서 깨어난 인공지능개발연구원 구안나는 아들 자인이를 먼저 챙긴다. 졸음에 잠긴 상태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다급하다. 곧 데리러 올 테니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경고. 영문을 모를 전화에 안나는 당황 하지만, 곧 그 말의 정체를 깨닫는다. 아파트 3층인 집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차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창문밖에는 온통 물, 물 투성이. 거대한 대홍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안나는 얼른 아이의 약을 챙긴다. 자인이는 아픈 아이다. 연약한 몸으로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인아, 업혀. 얼른 업혀."


전화 너머로 데리러 오겠다는 연구원을 만나, 위층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내내, 안나는 여러 상황에 부딪힌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간신히 도착한 옥상에는 그들을 데리러 올 헬기가 기다리고 있다.

20260104_202528.png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대홍수'스틸컷


'물'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고통이다.

엄마와 아이는 물에 닿을 듯 말 듯, 간신히 달아나기도 하고, 때로는 물속에 잠기기도 한다.

아이는 자꾸만 엄마의 손을 벗어나 사라진다. 엄마는 매 번 아이를 찾아야 한다. 그때마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늘어난다.


버림받았던 기억, 버렸던 기억.

태어났던 순간의 기쁨. 성장하는 과정 속의 아픔.

무기를 들고 지켜내야만 하는 용기. 반드시 꺼내주겠다는 결심.

희생해야만 하는 순간.


영화는 SF적 상상을 이용해 모성에 대해서 묻는다.


턱끝까지 물이 차올라도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가.


수천수만 번의 실험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니. 나와 내 아이가 떠올라서 내 눈에도 물이 차올랐다. 모성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고 헤매면서 내 몸도 가눌 수 없는 데도 눈을 크게 뜨고 팔을 휘저으며 아이를 찾으러 다니는 심정이 어떤 건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엄마도 어디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이 대홍수 속에서 빈 집에 몸을 숨겨야 하는지, 계단을 올라야 하는지.

아니면 때로는 물속으로 몸을 던져 피해야 하는 건지.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수천번, 수만 번의 기회가 있지만.

현실 속의 엄마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있다.


그래서 더욱더 절박한 심정으로 늘 아이를 찾아다닌다. 아파트 어딘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내 아이를.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는 결국 신인류개발에 성공한다.

지구로 신인류가 보내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지막을 장식한다.


억겁의 되풀이되는 인연으로 엄마와 아이는 단단하게 연결되어 다시 태어난다.


나와 내 아이도 전생이 있다면 아마 수없이 엉킨 실타래 같은 생을 되풀이했으리라.

그때마다 나는 찾아냈을까. 정답을.


엄마만 기다리며 몸을 동그랗게 말고 파르르 떨고 있을 조그마한 아이의 손을 떠올리며 가만히 대홍수 속에 발을 밀어 넣는다.

찾아내면 으스러지게 꼬옥 껴안고 뽀뽀를 마구 퍼부어줘야지.

어제도, 오늘도. 아마도 내일도 엄마는 그렇게 뛰어들 것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 시퍼런 물속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런던 베이글 뮤지엄, 사랑했고 배신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