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빵은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여행의 재미는 먹는 데 있다지만, 그때의 나는 악착같이 아껴야 했다. 큰 바게트 하나를 사서 세 토막으로 나눈 뒤, 걷고 또 걸으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눠 먹었다. 1일 1 바게트를 해야 미술관이라도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p44 '아무튼 빵은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신미경 작가님의 글 中
작가님은 정말이지 '젊어서 고생을 사서' 했다.
당시에는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식비를 아껴서라도 들어갔던 미술관의 기억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뒤로 던져버리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편안한 길을 버리고 경험에 투자하는 패기. 그런 것들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 아닐까.
작가님의 글을 읽으니,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게도 작가님의 잊지 못하는 바게트처럼, 잊지 못하는 빵이 있었다.
20대 초반 병아리였다. 첫 해외여행을 런던으로 떠났다. 얼마나 신나고 설레었는지 모른다. 친구와 둘이 동대문에서 싸구려 캐리어를 샀다. 돌돌돌돌~ 다닐 때마다 온갖 돌에 다 걸리고, 방수기능 따위는 없는 부실한 그 캐리어에 옷을 쑤셔 넣었다. (대체 무슨 믿음으로 그 먼 거리를 함께 할 생각을 했는지)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여행책자 한 권에 의지했어야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떠났다는 이야기다)
손바닥만 한 책자 한 권을 밤에 보면서 다음 날 여행지를 골랐다.
조그마한 동양인 여자 둘이서 런던시내 한가운데에서 그 책을 들고 오종종, 두리번두리번거렸다. 모든 게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몇 십 년 전인데도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이층 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를 내려다보던 밤.
나와 친구의 팔을 모두 합쳐도 껴안을 수 없었던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한 공원.
여기저기 자유롭게 사랑을 표현하며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헤매면서도 둘이서 킥킥거렸다. 그것조차 재미있었다. 낯선 곳에서 어린 여자 둘이 겁도 없이. 참 젊었고, 또 젊었다.
아, 그리워라! 그 시절의 나.
여행의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바로 언어였다.
영어라고는 헬로 하이, 땡큐. 아임 파인. 앤쥬? 정도만 가능했던 대한민국 영필자들.
덕분에 의사소통의 난이도가 높아지니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하기가 무서웠다.
저녁에는 런던에 거주하는 사촌언니의 도움으로 이런저런 맛있는 것들을 먹었지만, 낮에는 우리끼리 해결했어야 했다.
그날은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미라도 실제로 봤다. 삼성이 만들었다는 한국관도 봤다. 그 커다란 공간에 가득한 온갖 세상의 보물들을 하나라도 빠질세라 집중해서 보고, 또 보고 꼼꼼히 기록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지쳤다. 배가 고팠다.
지친 상태에서 또 영어를 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때 눈앞에 구세주처럼 가판대 하나가 나타났다. 핫도그였다. 메뉴도 단일메뉴. 딱이다. 저거다!
바로 주문을 했다. 정말 빵 사이에 소시지 하나를 딱 끼워서 주더라. 엄청 커다랬다. 그저 허기를 채울 목적이었다. 아무 기대도 없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우.. 우왓!!!!"
눈이 띠용 튀어나왔다.
한국에서 먹던 핫도그 맛이 아니었다. 놀라서 핫도그를 입에서 떼어내서 요리조리 돌려서 봤다. 뭐 특별한 거라도 숨어있나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그냥 평범하고 조금 컸을 뿐이었다. 다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빵의 식감에 육즙 가득한 소시지의 탱글한 식감이 섞여 들어왔다. 은은한 단 맛과, 짭조름한 맛, 거기에 훈제된 고기의 향이 사악 따라붙었다. 이야~ 미슐랭 3 스타가 부럽지 않았다. 길바닥에 앉아서 우걱우걱 말없이 감탄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빈 포장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맛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
배가 너무 고파서 급히 끼니를 때우려 샀던 빵이었지만, 그날의 내게는 천하제빵 일등 빵이었다.
심사위원이었다면, 바로 통과를 외쳤을 거다.
지금 그 가판대는 아직도 대영박물관 앞에 있을까? 다시 가서 먹으면 그 맛이 날까.
젊음, 무모함. 그리고 설렘의 맛.
그 한 입을 다시 맛볼 수 있다면, 어쩌면 내게는 그게 청춘의 샘 한 모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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