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벤의 트럼펫>은 음악이 흐르는 그림책이다. 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재생 버튼이 켜진다. 율동하고 있는 지그재그 선을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진다. 저녁이면 벤은 비상계단에 앉아 지그재그 재즈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그는 듣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음 속 악기인 ‘자신의 트럼펫’으로 함께 연주한다. 피아니스트와 드러머, 트럼펫 연주자 모습을 구경하며, 자신이 트럼펫 연주자가 된 양 흥겨운 재즈 리듬에 몸을 들썩거린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가족들에게 트럼펫 연주를 해 준다. 온 몸을 흔들며 허공에 상상의 악기를 연주하는 벤. 그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아이들은 이런 벤을 보고 깔깔거리고 비웃는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벤은 실망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벤의 트럼펫을 알아차리는 누군가가 있다. 바로 지그재그 재즈 클럽의 트럼펫 연주자였다. 학생들에게 “트럼펫 연주자는 어떻게 벤의 악기를 알아차렸을까?”라고 물었다. 한 학생이, 그 연주자 또한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했다. 자신도 피아노에 푹 빠져 있었을 때 음악만 흘러나오면 자동적으로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흉내를 냈다고 덧붙였다. 음악에 풍덩 몸을 적셔본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기가 보이는 것이다.
난 들려오는 음악에 온 몸을 흠뻑 빠져본 적이 있었을까? 막 서른이 됐을 무렵 교사연수로 재즈댄스를 아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워낙 몸치인지라 그 연수를 피하고 싶었으나, 가위바위보에 져서 어쩔 수 없었다. 흑인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흐르는 음악에 온 몸이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흐르는 몸짓이었다. 지금 음악이 멈춘다고 해도, 그 동작을 통해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그에 반해 나는 음악과 계속 따로 놀았다. 움직이는 젓가락처럼 뻣뻣함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경직된 몸에 힘을 빼야 한다며, “relax"를 자주 외쳤다. 음악에 집중되기 보다는,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내 몸에 집중했다. 음악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음악을 어떻게 시각적인 몸으로 구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림책 속에서 벤이 상상의 트럼펫을 연주하는 장면은 마치 음악과 하나처럼 보였다.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온 몸을 흠뻑 적신 것처럼 마음의 연주를 몸의 연주로 표현했다. 정지되어 있는 그림이었지만, 재즈 리듬에 맞춰 벤의 온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만약에 지금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다면, 재즈트럼펫 연주자 “윱 반 라인”의 “baby elephant" 같은 곡이 아닐까 혼자 상상을 하며.
매일같이 들려오는 음악을 몸과 마음으로 연주했던 벤, 그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지그재그 클럽의 트럼펫 연주자가 자신의 트럼펫을 건넨다. 벤은 실제로 어떤 음악을 연주할까? 끝나는 면지엔 지그재그 선이 그려져 있다. 벤의 실제 연주를 상상하라며. 공기를 뚫고 지나가는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이렇게 무딘 나의 가슴에도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