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아들이 힘든 누나에게

10.1.18 브리즈번 퀸즐랜드 아트갤러리에서

by 허용운

누나! 요즘 S의 짜증이 부쩍 늘어서 힘들지? 한편으론 S가 많이 컸다는 생각도 들어. 매사에 즐겁고 애교 많던 S가 이제는 현실에 불만이 생기고 부정적인 감정을 서툴게나마 표출하다니. S가 짜증을 안 내길 바라는 것보다 누나가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빠를 거야. 나는 지금도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걸. 자식의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 엄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아들을 키우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야.


난 S가 우리에게 온 뒤로 부쩍 육아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수 있는 나라나 도시를 물색하게 돼. S가 태어난 해에 내가 호주를 처음 갔잖아. 호주에 오래 살았던 것도 아니고 어느 곳이나 문제점과 고충이 있겠지만, 이 곳에서라면 아이를 조금 더 행복하게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호주 여행 중 브리즈번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을 봤어. 아이들이 많았던 장소 중 하나는 도심 속 인공해변이었어. 골드코스트에서 가져온 모래를 사용해서 만든 거래.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이 맑고 깨끗한 날씨 속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어. 부러웠어. 호주에 와서 여유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처음 보고 느꼈어. 우린 어릴 때 가족끼리 가까운 곳에 놀러 가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엄마 아빠도 일하느라 여유가 없었고, 우리는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학위와 자격증과 직업을 위해 책상 앞에 앉았어.


이곳에서 다운증후군 아이도 봤어. 사실 멜버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트램이나 버스 안에서부터 많이 보긴 했는데 이런 유원시설에서 본 건 처음이었어. 처음엔 '한국과 다르게 호주에는 왜 이리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많지?'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곧 알게 되었어. 인종별 역학의 차이가 아니라는 걸. 아이들이 어떤 상태이든 존재를 인정받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해.



또 한 군데 아이들을 많이 봤던 곳은 퀸즐랜드 문화센터였어.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이 한 군데 모여있는 곳이야. 멜버른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이런 문화시설 지구가 조성되어 있다는 건 이 도시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얼마나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해. 호주의 미술관 풍경은 한국의 것과는 사뭇 달랐어. 회화 전시관에는 의자도 많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충분히 그림을 감상해. 작품을 따라 그리기도 해. 그리고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보는 사람들도 있어. 참여형의 현대미술도 굉장히 많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작품과 공간을 즐기고 있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폐품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코너였어. 버려진 박스, 종이, 끈, 플라스틱 병 무더기가 공간 중앙에 쌓여있고 그 주변에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그 재료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어. 각자의 취향과 방식대로. 그리고 아이들이 만든 비행기가 공중에, 벽에 걸려 있었어. 어린 시절, 학교 방학 숙제를 위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열심히 작품 설명을 필기하던 나는 이 모습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어. 아이들은 버려질 수 있는 물건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성공 경험까지 얻게 되는 거잖아. 좋은 가치가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해.



누나! 남자아이들은 황당한 충동과 허세, 나름의 규율,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비밀을 갖고 있어. 사춘기가 되면 그 누구도, 아이 본인도 그 면모를 제어하기 어려워.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뭘까. 브리즈번에서 느꼈던 점을 빗대어 본다면, 먼저 어른들은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보고 아이들이 그 가치를 체득할 수 있게 환경을 미리 만들어줘야 해. 뒤늦게 아이들에게서 가치를 훼손하는 행동이 발견된다면, 이를 수정하는데 정말 힘겨운 노력이 들 거야. 그리고 아이들에게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주어야 할 거야.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우리와 함께 할 여유를 주어야 해. 아이들마다 성장과 문제 해결 방식이 다르니 그 과정을 존중해줘야 하고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될 거야. 충분히 성공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아이를 믿어줘야 해. 써놓고 보니 굉장히 추상적이네.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있으니 이럴 수밖에 없었어. 내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한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S가 행복하게 사는 거야.


누나와 S의 행복을 바라는 동생이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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