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체스키 누나에게

12.7.7 체스키 크룸로프를 둘러 흐르는 블타바 강에서

by 허용운

안녕하세요.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처음 만났으니 체스키 누나라고 부를게요. 왜 한국인은 이름보다는 나이와 직업으로 사람을 기억하게 될까요. 그때 누나는 31살이었고,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 6개월 유럽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어요. 퇴사를 결심한 이야기, 그동안의 여행 이야기, 앞으로의 일정 이야기를 듣고 누나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혼자 타지에서 보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강단있게 계획대로 척척 여정을 이어나간다고 느껴졌어요. 그때 어떤 마음으로 떠나왔던 건가요? 그 당시 '여자 혼자 유럽 배낭여행'은 대단한 로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는데, 누나가 여행을 다니면서 만나본 '혼자 유럽 여행 온 30대 한국인 여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던 농담이 기억나요. 누나처럼 오래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온 사람, 애인과 이별이나 파혼한 사람, 그리고 교사. 누군가에게 여행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주는 휴식일 수도 있겠죠. 또 누군가에게는 힘든 현실로부터 잠시 떨어져 피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살다 보면 슬픔에 압도될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권태가 짓누를 때, 영혼의 정화가 필요할 때, 새로운 경험과 영감이 필요할 때가 있죠. 그럴 땐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한 발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맡은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책임과 소유가 늘어나면 그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지기가 쉽지 않죠. 그 당시의 누나 나이가 되어보니 떠나고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겠어요. 저는 그런 현실에 얽매이기가 두려워서 자꾸만 떠났어요. 르고 경쟁적인 사회, 감정의 폭풍을 일으키는 사람들, 무의미한 고뇌에 가득 찬 나를 직면하기 무서워서 더 큰 용기가 필요하기 전에 떠났어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작년부터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창궐하면서 제 도피적 삶에 문제가 생겼어요. 질병으로 인해 세상과 산업은 격변했고 저는 혼란스러워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러면서 비로소 제 미로 같은 진로에 직면하게 됐어요. 인간관계는 많은 부분 단절되었고 어떤 관계는 완전히 저버렸어요. 관계에서의 책임, 미련, 외로움, 실망감에 직면했어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되었어요. 이런 과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에요. 현실을 견디고 바로 보는 힘이 길러지겠죠. 그리고 버티는 삶에서 획득한 소유물에 어느새 익숙해질 거예요. 그래서 만약 다시 떠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수개월 전부터 누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지만 한동안 일상의 권태에 파묻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동안 여행을 많이 다녀와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지난 사진을 보며 여행지의 풍경을 그려본답니다. 언젠간 곧 다시 떠날 수 있겠죠?' 따위의 자위 섞인 헛소리를 할 순 없으니까요. 체스키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려고, 블타바 강에서 카누 타는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몇 달 동안 쳐다봤어요. 그 당시 저는 강변에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어요. 카누를 타며 그 장면에 섞이고 싶었지만 이방인으로서 곳에 다가갈 용기가 부족했죠. 이렇게 멈추어 보니 후회가 느껴지네요. 비단 카누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행에서든 일상에서든 당시에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요. 시간이 더 지나서 지금 이 순간을 회상했을 때도 일상에 집중하지 못한 나를 후회하게 될까요. 어쩌면 일상을 버티는 용기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용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용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라도 몰입하는 용기를 조금 내봐야겠어요. 누난 잘하고 있으리라 믿어요.


2021.6.6

어디로 흐르는지 모를 시간에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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