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벌거벗은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 J에게

12.7.9 바트이슐 혼성 사우나에서

by 허용운

J야! 얼마 전 네가 정말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을 해줘서 많이 놀랐어. 여행 이후 9년 만이네. 요즘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은 다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넌 그냥 나의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했더구나. 넌 정말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더라. 너의 여행 스타일은 굉장히 자유로웠던 것 같은데 너의 근황을 들어보니 일상을 사는 스타일은 다소 계획적이라고 느꼈어. 나의 여행 방식은 나름 계획적인데 일상을 사는 전반적인 방식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것 같아. 같이 여행할 때 취향이 달라서 많이 힘들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J야! 그때 여행 동선도 다 내 계획이었지. 바트이슐은 온천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일부러 일정에 끼워 넣은 마을이었어. 실제로 가봤더니 시골 중의 시골이었지. 거리를 걷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우린 현지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어. 그 시선에는 경계심이 많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아. 온전히 이방인이 된 느낌은 꽤 재밌었어.


막상 온천을 찾기가 힘들었어. 한참을 헤매다가 네가 화장실이 급하다며 무작정 어느 리조트에 들어갔고 마침 거기에 온천시설이 있었지. 한국식 온천탕이라기보단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영장과 사우나 시설로 이루어져 있었어. 우린 따뜻한 수영장에 먼저 들어갔어. 바닥에서 거품이 나오는 풀에 앉아도 보고 레일에서 수영도 했어. 소금 온천이라 물맛이 약간 짰어. 공간이 단조롭다고 느낄 때쯤 어느 문에서 허리춤에 수건만 두른 남자 둘이 나오더니 우리 보고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보라 했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네가 옆에서 당황하며 여긴 누드존이라고 했어. 한쪽에 탈의실이 있었고 그 앞에서 직원이 우리의 짧은 세면 수건을 보더니 긴 수건 필요 없냐고 물었어. 빌리는데 4.15유로라고. 1유로도 아까운 학생이었던 우리는 제안을 거절했어. 실수였어. 다들 돌아다닐 땐 긴 수건으로 몸을 가리는데 우린 짧은 수건으로 가릴 곳만 겨우 가렸지. 수건으로 허리를 둘렀는데 길이가 모자라 손으로 한껏 수건 끝을 끌어당겨도 걸어 다닐 때 한쪽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어. 수건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어. 성별 관계없이. 우린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자 안에 아무도 없는 작은 습식 사우나 방에 들어갔어. 우린 한쪽 허리를 옥죄던 수건을 풀고 나란히 앉아서 방금 느낀 당혹감에 대해 이야기했어. 낯설었지만 생각해보니 재밌었고 신기한 경험에 곧 들뜨기 시작했어.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우린 수건을 조금 느슨하게 쥐고 밖으로 나왔어. 가이드북에서 봤던 '카이저 사우나' 방이 있었어. 입장 회차가 정해져 있었는데 마지막 회차만을 앞두고 있었어. 문으로 나있는 작은 투명 창문으로 속을 들여다봤어. 나무 계단이 3층으로 되어있고 다 벗은 사람들이 한 1~2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쭉 앉아 있었어. 나는 문 앞에서 주저했으나 네가 마지막 회차라며 당당하게 수건을 풀고 문을 열었어. 나도 따라 들어갔어. 이상하게도 밖에서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 안내 직원이 수건을 좌석에 깔고 앉으라 했지. 한쪽 구석에 우린 자리를 잡았어. 시간이 되자 안내 직원은 이제 시작하겠다고 말했어. 그 직원은 화로에 길고 널찍한 수건을 올리고 물을 부었어. 화로에서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시트러스 향이 은은하게 방에 퍼졌어. 곧 직원은 그 수건을 들어 나란히 앉은 사람들 쪽으로 크게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어. 그 향긋한 바람이 몸에 닿는 순간 등에서 땀이 순식간에 쭉 빠지면서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거야. 정말 깜짝 놀랐어. 직원의 수건질은 계속되었고 난 무언가에 취한 듯 황홀경에 빠졌어. 한바탕 상큼한 돌풍이 끝났어. 우린 수건을 손에 쥐고 문을 나서면서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어. 우린 나머지 공간도 자신 있게 들어가서 마저 사우나를 즐겼지.



J야! 낯선 것은 불편하고 어려워. 하지만 그만의 매력을 발견하면 곧 거기에 스며들게 되지. 그리고 그런 과정을 빠르게 이뤄내려면 그냥 생각 없이 부딪쳐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 권태롭게 앉아서 계획에 대한 계획만 세우고 있던 나에게 무작정 낯선 전화를 걸어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시켜 주어서 정말 고마워.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한 이 삶을 두근거리는 이방인의 태도로 살아봐야겠어.


21.10.2

자유로운 이방인을 계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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