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직장을 찾은 B누나에게

2012.7.12 빈 벨베데레 궁전에서

by 허용운

누나! 우리가 빈에서 만난 지 벌써 9년이 지났어. 빈의 어느 호스텔에서 2~3일 정도 같이 지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우린 한 번 만나면 이야기할 소재가 끊이지 않았던 것 같아. 각자의 감정 상태에서부터 여행, 취미, 연애, 직장, 진로, 경제, 사회, 역사, 철학까지. 최근에 잠깐 통화했을 때 누나는 건물 안에 갇혀있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았다고 했어. 그동안 많은 이직과 직업 전환을 하면서 지쳤을 텐데 누나의 특성과 맞는 일을 찾았다니 다행이야. 아주 예전에 누나가 했던 말이 기억나. 무슨 일을 하든 일하는 건 힘드니까 일하는 시간과 여유 시간을 잘 분리해서 여유 시간에 좋아하는 걸 하면 되는 것 같다고. 그땐 나도 그 말에 동의했던 것 같아.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어서 엄청 힘든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 나의 흥미나 적성보다는 월급 액수나 연차 수, 휴무일 같은 근무 조건을 우선순위에 두고 고른 직장에 다니고 있어. 처음엔 좋았는데 수록 재미나 가치, 의미나 깨달음을 느끼기가 힘들어서 점점 괴롭고 그 괴로운 마음이 내 여유시간까지 자꾸 침범해.



누나! 내가 마주쳤던 많은 여행자들은 빈에 대해 별로 볼 것 없고 재미없는 도시라고 말했어. 하지만 난 빈이 가진 문화예술 콘텐츠가 정말 좋았어. 클림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갔어. 우리가 같이 갔던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키스'를 봤지. 실제로 보니 미술책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화려하고 압도적이었어. '어떻게 회화에 금박과 모자이크 패턴을 쓸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고 있었는데, 오디오 가이드에서 클림트가 초반에는 사실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말이 흘러나왔어. 깜짝 놀랐어. 내가 알고 있던 클림트의 작품이라고는 죄다 장식적이고 동화적인 금빛 그림이었는데. 나중에 클림트에 대해 찾아봤어. 클림트는 어릴 때 황실에서 세운 공예학교를 나와 실내 장식이나 벽화를 그려주는 회사를 만들었대.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이라는 작품에 당시 유명 인사 250명의 초상을 다 그려 넣을 정도로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고전주의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받던 화가였대. 돈도 꽤 많이 벌었나 봐. 그러다 30살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되고 큰 충격을 받아 활동을 멈췄대. 그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분위기였는데, 클림트는 33살에 본격적으로 다시 붓을 들어 자신만의 사유와 개성이 담긴 새로운 형태의 그림을 내놓기 시작했대. 그림의 주제도 그 당시 사람들이 터부시했던 욕망에 대한 것이 많았고. 그림에 금박을 이용한 건 금세공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패턴 도형을 이용한 건 이탈리아 여행 중 비잔틴 모자이크 양식을 접한 영향이라고 추정하는데 예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미 모자이크 기법을 익혔던 것도 같아. 너무 독창적이어서 그럴까. 클림트가 어떤 미술사조를 이끌었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는 당대 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지.



누나! 우린 한국사회에 이바지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기 위해 정규 교육을 받았어. 내가 속한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변화하는지 모른 채 착실히 내 앞에 주어진 것만 한 것 같아. 그런데 노동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노동의 결과물과 자본으로부터 인간은 더욱더 소외되어 가지. 우리 세대는 그래서 더 불안하고 무기력한 것 같아. 난 요즘 나의 삶을 돌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어. 큰 종이에 가로선을 쭉 긋고 그 위에 눈금을 그려서 1부터 100까지 나이를 표시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활동,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사건과 사람, 경력, 여행과 취미, 자산, 그 당시의 감정 등 나의 역사를 적어 봤지. 이 모든 걸 종합해보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나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내가 가진 걸 토대로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돈도 벌 수 있을지 떠오르는 것 같아. 나로부터 해답을 찾고 나 스스로를 개혁해서 크고 작은 변화를 이뤄보고 싶어. 클림트가 자신의 '황금 시대'를 만든 것처럼. 누나도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 여유 시간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까지도 내가 소외되지 않는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바랄게.


2021.10.5

작고 네모난 독방에 묶여 10시간 째 일하던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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