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G에게

12.7.15 부다페스트 시타델라 요새에서

by 허용운

G야! 아직도 많이 슬프고 우울하니. 너와 나눴던 깊은 좌절감을 기억해. 너무 힘들어서 말할 수 없던 그 침묵의 순간까지도. 난 상처 받아 주저앉은 사람의 절망 섞인 이야기를 잘 들어. 그 절망을 품에 안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더 좋아하지. 아무리 삶이 검은 진흙탕 같아 보여도 누구에게나 그 속에 작은 흰 꽃 하나는 간직하고 있다 믿기 때문에 웬만큼 비참한 이야기에 심하게 동요하지 않아. 오히려 애통한 사연보다 더 두려운 건 그 슬픔 뒤에 혼자 남는 외로움이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상처 받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못하지. 얼른 고치려 들거나 훌훌 털고 일어나라고 하지.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야. 내가 침울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추락할 때 그냥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며 믿어줄 사람을 찾고 싶어서일지도 몰라.


G야! 넌 언젠가 나에게 부다페스트에 가보고 싶다 했어. 어릴 때 우연히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보고는 부다페스트의 멜랑꼴리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했지. 부다페스트에 가본 적이 있어. 오래 있진 않아서 편견이 섞인 말이겠지만 그곳은 너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도시는 맑던 흐리던 차분했어. 건축물은 시대가 뒤섞여 고풍스럽기도 하고 낡기도 하고 단정하기도 했어. 건물이 만들어내는 그늘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흘렀는데, 어쩌다 그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몸 주변이 포근해지면서 다소 날카롭게 느껴졌던 건물벽이 찬란하게 빛났어. 해 질 녘 세체니 다리를 지나는 기분은 정말 오묘했어. 철제 기둥 사이로 주황색 햇빛이 비치는데 어찌나 감상에 젖게 되던지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지. 다리를 지나 요새에 오르면 부다페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야경이 펼쳐져. 해가 떨어지면 도나우 강은 여광을 품어 노랗게 짝이다가 이내 검게 변해. 어둠 속에서 다리와 건물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고 물속엔 노란색 도시가 웅장하게 비치지. 풍경이 너무 넓고 커서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경치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도시는 어두운 시간에 가장 아름다웠어.


G야! 아픔과 비극이 없는 나라는 없겠지만 헝가리도 꽤나 굴곡이 많은 나라인 것 같아. 헝가리는 옛날 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았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했고 사람들은 실업과 경제난 때문에 자살했어. 이때 유명했던 노래가 '글루미 선데이'야. 유대인들은 파시스트에게 학살당했어. 그들을 추모하는 신발 조형물이 도나우 강변에 있어. 그 후 헝가리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사람들은 소비에트 정권의 만행에 숙청당했지. 파시스트와 소비에트 정권의 잔인한 행태를 고발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house of terror' 박물관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파래서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 나. 이런 상처를 입고 도시는 살아남았어. 세대를 거친 폭력의 트라우마는 곳에 쌓이고 그렇게 은 농은 하나둘 터지겠지만, 그래도 도시는 빛나고 있어. 리고 생존한 모습 그대로를 사람들이 와서 바라봐.


G야! 네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나는 다 헤아릴 수 없어. 이 세계에는 다양한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그저 살아남은 서로의 모습을 볼 뿐이야. 슬픔을 간직한 건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세상에 있는 그대로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슬픔은 온전히 보여야 해. 그래야 다른 친구들도 용기 내서 너와 함께 빛날 수 있어. 그러니 사라지려고 하지 말아.


2021.10.9

슬픔에 대한 예찬에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바라며



이전 14화새로운 직장을 찾은 B누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