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뜻을 새기는 J선생님께

12.7.5 프라하 까를교에서

by 허용운

J선생님! 선생님께 현대무용을 배운 지도 5년이 넘었네요. 어쩌다 보니 사라지고 잊혀가는 공간에 춤을 남기는 선생님의 프로젝트에 지금까지 참여하고 있네요. 지난 10월 인천에 답사 갔던 게 생각나요. 강경애의 <인간문제>에 나오는 배경지를 따라가 보면서 일제시대 조선인 노동자와 노동 현장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어요. 너무 많은 곳이 개발되고 해체되어 옛날 모습을 상상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요. 심지어 조선인 노동 투쟁의 역사가 담긴 현장에 일본 의류기업 매장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소름 끼쳤네요. 어쨌든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서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왜 그렇게 여행을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어요.



제 첫 유럽 여행이 떠오르네요. 대학교 다닌 지 4년째 됐을 때, 언제나 똑같은 회색 도시와 뿌연 공기가 답답했어요. 낯설고 특별한 공간에 저를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덜 알려진 중부 유럽에 가보기로 했어요. 부푼 마음을 안고 프라하 국제공항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프라하에 도착해서 제가 느낀 첫인상은 똥냄새예요. 공항에서 똥냄새가 왜 그렇게 나던지요. 시내로 가기 위해 자판기에서 버스 티켓을 샀는데 버스 기사는 이 티켓이 아니라며 돈을 달래요. 돈을 이중으로 내고 시내로 왔어요. 숙소로 가는 길, 울퉁불퉁 요철이 심한 돌바닥에 새로 산 캐리어의 바퀴가 다 깨지는 줄 알았어요. 숙소에 짐을 풀고 동네 구경을 하다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어요. 체코 전통 음식을 시켜봤는데 너무 입에 안 맞아서 절반도 넘게 남겼네요. 야심한 시각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무릎을 꿇고 구걸하는 젊은 남자, 매춘부, 마약 판매상을 봤어요. 낯선 곳에 왔다는 흥분은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차분히 가라앉았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 본격적인 시내 구경을 했어요. 프라하의 길은 너무 미로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길을 엄청 헤맸고, 지쳐서 들른 식당에서는 샐러드와 음료만 주고는 메인 메뉴를 1시간 동안 안 내줘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답니다.



힘들게 까를교에 도착했어요. 까를교는 프라하 성 지구와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다리인데, 다리 위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사람들,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과 많은 관광객들로 가득 매워져 있었어요. 그 아래로는 블타바 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한적하게 낚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한쪽에서는 프라하 성의 고풍스러운 자태가 보이고, 반대편을 돌아보면 아치형의 기둥 사이로 복작복작한 마을 풍경이 엿보이는데 그 사이로 말이 힘차게 달려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요. 도시 전체를 돌아보니 건축박람회에 온 기분이었어요. 광장은 다양한 시대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어요. 어떤 건물은 길고 뾰족한 지붕을 달고 있었고, 어떤 건물은 둥근 지붕을 하고 있었으며, 창문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동상이 달려 있었어요. 네모 반듯한 건물도 물론 있었는데 외벽 색이나 창문 크기, 모양은 다 달랐어요. 역사를 간직한 프라하의 도시 풍경은 지금 이 곳이 어디인지,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어요. '낭만적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은 흔적을 보존한'이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까를교에 도달한 뒤로 저는 이 도시의 건물과 길, 사람들에게 녹아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어요.


선생님과 같이 도시재생 무용 프로젝트를 하면 항상 시공간을 초월해서 여행한다거나 꿈을 꾼 느낌을 받아요. 공연을 하거나 촬영을 하고 나면 한동안 현실로 돌아가기 어려울 때도 있었어요. 청파동 작업만 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어요. 600년 된 은행나무 뒤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인 저택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한국 전쟁 때 시체를 쌓아두던 차가운 42계단에 거꾸로 누워보기도 하고, 제가 아주 어릴 때 누나와 함께 뛰어놀던 좁은 골목과 비슷한 느낌의 길목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녔죠. 그러다 봉제공장 옥상에서 주변 경치를 보는데 유명 브랜드 아파트가 자연스럽지 않게 우뚝 솟아있는 걸 봤어요. 미래에는 한국의 수많은 아파트 단지도 어떤 이야기를 가지게 될까요? 낭만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크고 새로운 것이 작고 낡은 것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집 앞 공원에서 보이던 남산타워가 거대한 회색 상자에 가려졌거든요.


선생님! 저에게 왜 여행을 하냐고 물으셨죠. 글쎄요. 저는 다양한 이야기가 좋아요. 흔적을 담는 바람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2020.12.19

다시 움직일 수 있길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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