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봄꽃들이 화려하게 수놓은 가로수길, 빨간 머리 앤이 그토록 찬탄했던 '기쁨의 하얀 길'이 여기저기 펼쳐지는 요즘이다. 창밖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도 봄의 살랑거림에 설레는 계절, 상상력의 옷자락이 너풀거리는 빨간 머리 소녀를 매일 만나는 기쁨이 시작되었다. 36명의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하루 10분 100일의 영어 필사의 대장정이 기대감과 함께 막이 오른다.
필사 시작 전부터 저마다의 인생 어느 지점에서 만난 빨간 머리 앤과 재회하는 설렘이 한껏 느껴진다. 필사 노트, 필기구, 스티커, 빨간 머리 앤 소장용 한글책, 봄꽃 등과 함께 마음을 담아주신 사진들을 보며 앤이 부러워진다. 그녀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 겉으로 보기에 여리여리 하지만 내면이 강한 소녀의 삶이 남긴 자취가 깊고 진하게 퍼진다.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해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은 분명 나만의 것이니까요.
필사를 준비하며 다시 바라본 앤은 반올림의 대가이다. 반이나 비어있는 여백을 소망과 기쁨으로 채워 넣는 반올림 정신, 상황이 주는 허함을 꽉 채우는 영리한 삶의 태도이다. 어쩌면 이리도 그저 흘려버릴 수 있는 마음을, 생의 빈틈을 단도리치며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아내었을까?
알짜배기 시간은 챙겨가는 사람의 몫인 것 같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삶에서 시간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니지 않는 것. 그것이 여백이든 채움이든 간에 의미로 끈끈하게 엮고 쫀쫀하게 조이는 작업은 내 삶에 대한 사랑이자 책임이다.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각자의 시간, 속도, 취향에 맞춰 필사로 삶의 터를 다져간다. 다른 이의 생각을 읽고 나의 생각이 읽히며 앤이 바라본 세상을, 너와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요리조리 굴리며 마음에 담는작업은 한마디로 풍요로움이다.
필사를 함께 하는 동무들이 많아지니 서로에게 내어주는 품들이 훨씬 더 넓어진 것 같다. 필사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초대장을 건네어 드렸더니 입장 후, 넓은 뜰안에서 마음껏 알아서 노니는 선생님들을 보게 된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리를 마련해 드리니 마음껏 사색하고 소통하는 모습들이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준다. 이 온기를 끌어안고 앤과 함께 100일을 꽉 채워 걸으며 필사의 흔적과 나눔의 흔적이 선생님들 마음속에 추억으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