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재미

건강을 전제로!

by 위혜정

때는 바야흐로 20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살과의 전, 남동생의 한마디가 강력한 기폭제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집 앞 현관문을 열었다. 근 1년 만의 가족 상봉이었으나 전혀 예기치 못했던 어퍼컷에 허가 찔렸다.


"누나, 임신했나? 왜 이리 살쪘노?"


결혼 전인 처녀에게 임신이라니. 바다 건너에서부터 몸 구석구석에 쟁여온 지방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다. 살이 차고 빠지는 미미한 차이를 상쇄해 버리는 매일의 부대낌이 전무했던 터라 그의 팩폭을 마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칼로리 음식들 앞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경험'이라는 필터를 끼워 넣고 무장해제했던 지난날이 무참했을 뿐.


충격적인 일격에 휘청이며 무겁게 두르고 온 7kg을 감량하겠다는 일념 하에 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목표는 한 가지, 임신한 아이를 몸 밖으로 빼내고 출산 후 가뿐한 몸으로 원상 복귀하는 것. 졸지에 애엄마가 될 뻔한 처녀의 의지는 눈물겨웠다. 3개월 간 짧지만 굵게 식단 조절과 운동 병행하며 독하게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결과는 달았다. 기존보다 날씬해져서 3학년 2학기에 복학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가슴에 사무치는 코멘트 폭발력을 뼈저리게 경험하 젊은 날이었다.




먹는 것에 그리 욕심 없다. 강렬한 다이어트 전후의 기억이 남긴 상흔인지 원래 그랬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배고프지 않으면 되고 허기질 때 배만 채워주면 끝이다. 장시간 줄 서서 기어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야 마는 맛집 여행가들의 정성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 바로 나다. 식도락을 가득 안고 여기저기 맛의 장인들을 탐방하는 인생 재미를 손톱만큼도 나눠줄 수 없어 남편에게 늘 미안하다. 다행히 아들이 장단을 잘 맞춰준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손으로 쌍따봉을 날리며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엄마, 너무 맛있어요!"

"엄마, 오늘은 OO가 먹고 싶어요."


남편의 미식가적 기질과 먹방 유전자가 아들에게 사뿐히 안착되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괴로운 결정 앞에 콕 집어서 지정해 주는 둘의 콤비가 그렇게 명쾌할 수 없다. 알쏭달쏭한 선택지로 가득한 시험지를 쳐다보며 어떤 답을 찍어야 할까 망설이는 괴로움을 가뿐히 건너뛰어 정답으로 돌진하는 느낌이랄까. 맛있는 음식 앞에서 입맛을 다지며 행복하게 배를 채우는 부자의 모습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남겨진 분량, 일당 백도 채우지 못하는 나의 접시를 비워주기까지다. 빵빵하게 동그라미 쳐진 시험지를 받아 든 듯 만족감이 차오른다.


가정을 넘어 학교에서도 잘 먹는 학생들을 보면 그저 좋다. 메뉴가 맘에 안 들면 점심을 거르는 학생들 보다는 뭘 주든 맛있게 먹는 녀석들이 까다롭지도 않다. 우리 반에 먹성 좋은 두 학생이 대표적이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 인사다. 키와 덩치가 있다 보니 점심시간이면 교사 배식구에서 추가로 더 먹는 고정 멤버다. 반에 단체 햄버거를 시켜주었을 때에도 남은 버거를 한 개씩 더 가져가서 먹은, 그야말로 음식 앞의 열정 뿜뿜이다. 그저 잘 먹는 것이 이쁘고 부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깨달았다. 먹는 재미 뒤에 건강의 위협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고민할 문제다.


"선생님, OO는 건강 상 식단 조절을 해야 해요."


어쩌다 말이 나왔는데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엄마는 집에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이 녀석은 학교에서 고봉으로 밥을 먹고 있다니. 아이를 불러다 물어보았다.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그동안 허기진 배를 점심으로 채웠던 것이다.

"건강이 먼저지! 세끼 조금씩 나눠 먹고 저녁도 굶지 말고 점심도 꼭 한 번씩만 먹어!"


몇 번을 신신 당부하는데, 먹지 못한 설움을 겪었던 다이어트 시절이 소환된다. 마음껏 먹다가 남겨진 살로 인해 결국 음식 섭취를 최소치로 떨구어 내야 했던 곤욕스러운 시절 먹는 재미의 대가로 치러내야 했던 마의 구간이었다. 가녀린 팔과 허벅지, 40kg대의 몸무게를 목표로 식욕에 걸쇠를 꽉 걸어 잠겄던 그때. 과식 금지가 철칙이었다. 너무 잘 먹는 것은 오답이다. 너무 안 먹는 것도 아니니 적절한 선, 중도 바로 정답이다.


시간이 흘러보니 알겠다. 다 필요 없고 건강이 우선이다. 과식은 소중한 몸 안으로 음식물을 꾸역꾸역 쓸어 넣는, 일종의 학대다. '먹는 재미'라는 착각으로 가속화된 습관적 섭식장애고 해야 할까. 술, 고기, 담배를 과하게 했던 아버지가 대장암 수술을 하셨던 것도 과함이 가져다준 불운이었다. 먹고살자고 일하는데 먹는 즐거움만큼 큰 건 없다. 그렇다고 살 날들에 칼을 대는 과용한 식음은 떨궈내는 것이 옳다. 맛있게 먹자. 단, 건강으로 필터링한 식탁이 전제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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