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벗글벗 워크숍
요즘 초등학생들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살아간다. 빡빡한 하루 일과 안에서 자율적인 선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늘어져 있는 시간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대입을 위한 입시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숨통을 조이기 시작한다.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사교육의 사슬을 딸칵 채우기 시작하면 벗어나기도 어렵다. 조급하고 불안해서 멈추지 못한다. 점차 단단하게 동여매어질 뿐. 하루하루 주어지는 과업을 해치워가기 위해 아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십 대의 대부분을 소진한다. 대입을 향해 선행과 심화의 쳇바퀴를 도는 모습을 학교에서 20여 년째 바라보며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다. 열심히 하든 열심히 하지 않든 입시의 관문을 거치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고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미국 학생들 역시 긴 여름 방학을 캠프나 각종 활동들로 꽉 채운다고 하는 걸 보면. 8주나 되는 여름 방학을 다양한 스케줄로 꾹꾹 눌러 채우려는 미국 학부모들은 방학 전부터 분주하다. 기나긴 시간을 허송 세월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교육 프로그램에 묶어두는 비용을 부담하려고 전체 30프로에 해당하는 부모들이 대출까지 감수한다고 한다. 방학인데도 아이들을 어딘가로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 앞에 학부모들의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상당하다.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명 Kid rotting. '아이 썩히기'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Kid rotting'이란 스케줄로 일상을 빡빡하게 채우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이들을 그냥 두는 것을 말한다. 풍기는 뉘앙스 자체가 고약하다. 그저 빈둥거리는 것을 부패의 의미와 결합하다니.
분주함을 삶의 디폴트 값으로 놓고 여유를 즐기는 것에 부정적인 어감을 덧입힌 셈이다. 효율과 효용을 중시하는 현세대의 시선이 반영된 자극적인 용어이다.
단, 반전이 있다. 빈둥거림의 Nothingness(무) 안에 아이들은 썩는 것 같지만 다양한 가능성이 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Kid rotting', 'let them rot(자유롭게 놀게 두는 것)'의 철학은 판을 깔고 떠먹여 주다 보니 망가져버릴 수 있는 아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전환할 수 있다는 희망에 초점을 둔다. 당장은 텅 빈 여백과 같은 삶이지만 자기 주도성, 창의성, 지겨움을 이겨내는 힘 등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매력적이다.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다. 방임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과하면 안 되는 법. 통제도 방치도 아닌, 적당한 중도와 균형이 필요한 것이 교육이다.
"엄마, 방학 때는 아무 학원도 안 갈래요. 그냥 집에서 놀래요."
아들이 겨울 방학 전에 한 말이다. 살짝 가슴이 찡했다. 집과 학교가 멀어서 엄마가 등하교 라이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퇴근 시간까지 예체능 학원을 전전긍긍한 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방학만큼은 그냥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을 내비친다. 체력은 포기할 수 없어 운동을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하는 방학 특강조차 일절 신청하지 않았다. 집에서 늦잠도 자고 빈둥거리는 시간을 어느 정도 허용한다. 방학 과제 등의 집공부는 병행하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앞으로 입시에 절어버릴 수 있는 아이의 미래를 경계하며 '어떻게 키워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한다. 공부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문해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성, 문화력을 길러주고 싶어 책 친구들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책벗글벗이 벌써 4년째 접어들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부산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 해운대 엘시티 레지던스에서 아이들을 통해 '무계획이 계획이다'라는 말이 실현되는 시공을 경험했다. Kid rotting의 현장이었다.
아이들은 1박 2일 동안 여유와 즐거움으로 시간을 꽉 채운다. 그 어떤 개입 없이도 그저 자기들끼리. 실내에서는 베개 싸움, 귤껍질 길게 까기, 경도 등 매 순간 놀이를 바꾼다. 실외에서는 해변에서 하루 종일 바닷물, 모래와 함께 뒹군다. 놀랍게도 부산의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놀 수 있었다. 이것저것 아이들과 할 프로그램을 짜갔지만 그저 풀어놓은 시간 안에 노니는 모습을 보며 내년부터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자는 데 모두 동의했다. 어른들이 짜준 프로그램 없이도 여백 속에 푹 잠겨 자기들끼리 주도적으로 시간을 끌어 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므흣했다. 때 되면 배만 채워주면 되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아이들을 어떤 틀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미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부모들 역시 아이들 근처에 앉아 아침부터 해 질 녘 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바다 내음을 맡으며 가만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면을 응시했다. 때론 침묵으로, 때론 대화로 시간의 흐름에 뒹굴대며 서서히 아이들이 그려내는 시간의 뒷배경이 되어갔다. 말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썩어간(?) 시간이다. 썩는 것, 쉽지 않다. 하지만, 해보니 나쁘지 않다. 1박 2일로 부족하니 내년엔 2박 3일 워크숍을 하자며 제대로 푹 썩어볼 계획을 할 정도이니.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당장은 불안하고 비생산적 일지 모른다. 하지만 썩은 거름이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삶도 비옥해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