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이십 대

20년 지기 회사 친구들

by 위혜정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어떠셨나요?


그림책 독서 모임에서 훅 들어온 발제 질문이다. '리즈 시절'이란 전성기, 황금기 등과 같이 찬란했던 때를 의미하는 말로 영국 잉글랜드의 한 도시인 '리즈(Leeds)'를 가리킨다. 축구선수 앨런 스미스(Alan Smith)가 과거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 FC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것을 두고 ‘스미스 리즈 시절’이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저의 리즈 시절은 지금입니다. 젊을 때 너무 힘들었기에 이제야 마음의 여유를 찾고 조금씩 나를 발견해 가는 행복을 경험하고 있거든요. SNS를 배우러 등록한 프로그램에서도 제가 제일 어리더라고요. 이삼십 대 젊은이들과 함께 수강할 땐 그들의 빠른 반응 속도와 저의 어리버리에 긴장으로 짓눌렸는데 어르신들과 수업을 들으니 제가 제일어서 수강생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도 편해요."


멋들어진 답이다. 나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동일한 답을 복사한 그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나 역시 지금이 가장 좋다. 대부분 리즈 시절, 하면 떠올리는 때가 꽃다운 십 대 혹은, 이십 대이다. 젊음의 추억은 언제나 아련하고 가슴 시린 법이라 타임머신을 타고 꼭 다시 돌아가 보고 싶어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생물학적으로 인생에서 아름다움의 절정기는 이십 대 중후반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적당한 경제력을 동반한 젊음, 생기와 에너지가 숨겨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예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을까? 단호하게 머리를 젓는다.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청춘이 뿜어내는 매력은 넘쳐나지만 그 상응하는 고뇌와 힘듦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녀처럼 나의 리즈 시절 당당하게 "지금이에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이십 대의 딱 한 구간, 비슷 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던 시절이다. 메인 사무실에서 뚝 떨어진 우리만의 조그마한 공간 앉아 이십 대 중반의 꽃다운 청춘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지고 볶았던 이다. 5명의 MD(Merchandiser:상품 기획자)들 독수리 오 형제처럼 붙어서 야근 밥먹듯이 했다. 시즌별로 전국을 돌며 밤을 꼴딱 새우면서 매장 개편을 해야 했다. 피곤에 절은 몰골, 먼지 덮인 작업복 업무는 기본으로 깔고 갔다. 때마다 유럽, 동남아, 미주, 홍콩 등 해외 출장을 짧은 일정으로 소화했고, 매일 아침 회장님 주재의 긴장감과 박진감 넘치는 회의에서 울고 웃어야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나날이 고된 업무의 폭탄을 맞다 보니 우리끼리 돈독하고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그때 그 시절,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좋았던 과거이다. 내 인생의 가장 예쁨 뽀짝 했던 그때에 함께 옆을 지켜준 그들이 애틋하리 만큼 소중하다.




20년이 지났다. 코로나를 거치고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 우리, 그 회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단 한 명에게 "대단하다!"를 남발하며 추억을 나누었다. 언제나 웃음을 선사했던 언니는 '나 튜닝을 좀 했어!' 하며 세월의 흔적이 비껴간 미모를 빛냈고 20년 차 터줏대감 동생은 정말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꿋꿋하게 일하는 태도나 외모가 놀라웠다.


"나 혼자됐어. 그래도 남자 친구 있지."

"언니, 나도!"


폭탄선언들을 줄줄이 하는데 동그레진 내 눈을 본 탓인지, "뜬금없이 카톡에다가 '나 이혼했어.' 말할 순 없잖아?" 언닌 언제나 유쾌하다. 힘들었던 시절을 다 견뎌내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질 수 있는 과거를 잘 버텨온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이를 거스른 모습은 애 키우는 나에게만 예외인가 보다. 친구 한 명은 토요일도 여전히 회사 이벤트에 참여하느라 '늦게라도 갈게!'의 약속을 못 지켰고, 나머지 동생 한 명은 둘째의 열감기 때문에 갑자기 발목이 잡혀서 볼 수 없었다. 과거 근무지였던 광화문 근처에 모여 박제되어 있던 이십 대의 기억을 소환하여 이리저리 굴린다. 쏟아지는 담화들이 진국이다. 다섯 명 모두를 만나지 못했지만 다음번의 완전체를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엄마를 따라 함께 온 아들은 알지 못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 틈바구니에서 또 다른 시간을 노닌다. 리즈 시절의 입구에도 닿지 않은 아들은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인생을 어떻게 기억하며 떠올리게 될까?


힘들지 않은 기억들이 많으면 좋겠다.

아니, 조금 힘들어도, 많이 힘들더라도, 잘 이겨내면 좋겠다.

만남의 축복으로 손잡아 주는 사람이 늘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아들이 축복이 되어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면 더 좋겠다.

나날이 인생의 리즈 시절을 갱신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때마다 외롭지 않게 함께 리즈 시절을 채워가는 상대가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엄마의 과거를 옆에 앉아 지켜주었다. 고마워. 엄마 역시 너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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