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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Nov 20. 2018

처음처럼



나는 쓴다.

'처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라 부르기 힘든 것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것들의 경직된 고통에 관해서,

또 그것들의 어설픈 실수에 관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삶에 관해서,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불편은

곧 어떤 용기 앞에서,

내 손과, 발과, 묵직한 엉덩이 밑의 은밀한 욕망 앞에서,

서슴없이 무너지면서도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처럼 말간 얼굴로 웃는다.

웃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본디 그렇다.

이를 테면, 언제나,

처음은 있으나 처음으로 불리기를 거북해 하는

그, 처음들의 부끄러운 고백이

바닥에 떨어져 밟히다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그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꽃이 피어난 처음은 운이 좋은 처음이다.     


비 오는 밤,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순을 밟는다.

그도 처음이었고

나도 처음이었던

우리의 처음은

스무 살, 우리가 따로 겪어냈던 수많은 처음들 위에서  

혹은,

서른 살의 처음과 마흔 살의 처음들에 둘러싸인 채

같은 이름의 소주 한 잔과,

질펀한 취기들에 뒤섞인 주정들과,

밤길을 비추는 24시의 네온사인들과,

뜻 모를 질문들로 이어진 꿈과 함께

일어섰다 넘어지고, 깨었다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라고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이라고 쓰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처음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이라고 쓰고

나는 웃는다, 다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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