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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Apr 17. 2016

'숨그네'와 '1Q84'에 관한
사뭇 진지한 고찰

- 너무 오래 묵혀서 곰삭은 독후감 -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관한 

사뭇 진지한 고찰.


원래 글의 제목이었다. 

브런치에서는 30글자 이상의 제목을 용납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된다는 경험을 또 얻는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렵다. 두 작품 다.

특별히 어려워서도 난해해서도 아니며 애매모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복잡하다. 

한 가지로 단언하기 어려운 복잡다양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간단하게 규정짓기가 어렵고 쉽게 묶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두 작품 모두 재미있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전제 하에.

거기다가 그간 내안에서 숨을 못쉬고 움츠러들었던 문학에의 자긍심을 한 방에 구원해줬다.

나는 때때로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인가? 라거나

누구에게 도움이 되나? 따위의 문제들에 대해 심리적 압박을 느낄 때 마다 

-여기서 지칭하는 누구는 불특정의 타인이 아닌 내 자신, 혹은 나의 행위나 관념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주변인들을 말한다- 

내가 추구하고 의지하는 문학의 힘을 떠올리면서 흔들리는 자긍심을 바로 세우고 방향성을 정하곤 했었다. 

내 스스로 위대한 문학을 정립하지 못한 어설픔을 떨치지 못한 만큼 양질의 독서는 그 힘을 축적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존경할만한, 혹은 그 필살과 직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을 만나고 나서야 내꿈이 그저 한 때의 유치한 치기가 아닌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물로써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두 작품을 따로이 정리하지 않고 한 자리에 펼치는 이유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문체를 가지고서도 동시에 한 방향을 가르쳐주는 각각의 독특한 서사성에 나의 비교관점을 들이댄 탓이다. 

'뮐러'는 '숨그네'를 통해 인간이 처한 비극적 극한의 현실을 몽환적이면서도 예리한 문학적 비유을 이용, 

추상적 관념으로 묘사했다. 

'하루키'는 '1Q84'를 통해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이용,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 공간을 구체화한 완벽한 환타지를 구성해냈다. 적어도 내 느낌엔 그랬다. 얼핏 봐도 두 작품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아니, 사실 없다고 봐야 옳다.

하나는 강제수용소의 피폐함과 곤고함에 관한 이야기고

하나는 공상과학에나 등장하는 다른 차원에의 이동 내지는 결합에 관한 이야기다.

각각의 작품에 쓰인 언어들의 차이 또한 극명하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뮐러가 비유와 신조어를 곁들인 다소 애매모호하다 싶게 여겨지는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고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하루키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뭔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문학적 반전이 있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톰점이랄 수는 있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 

나는 나를 너무나 깊이, 그리고 너무나 오래

침묵 안에 싸두었던 탓에 어떤 말로도 

나라는 짐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눈밭은 우리를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던지, 

맨엉덩이를 드러낸 우리를 아랫도리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외롭게 버려두었다. 그 유대 속에서 우리의 오장육부가 

얼마나 초라하던지

살이 빠지면 뼈는 천근만근이 되어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걸릴 곳이 없는 뼈들은 오로지 나한테만 걸렸다.

배고픔은 떠난 적이 없는데도 다시 찾아온다. 외로움도 그렇다.

권태의 종류는 다양하다. 빨리 지나가는 것도 있고, 

뒤늦게 절름절름 찾아오는 것도 있다. 

권태를 잘 다루면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뿐더러 

날마다 내 재산이 된다. 

나의 거만한 열등감.

나의 투덜거리는 두려운 소망들.

나의 지긋지긋한 조급함, 

나는 무(無)에서 곧장 전체로 뛴다.

나의 방어적인 양보심, 

나는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불평할 여지를 남겨두려고 

일단 사람들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준다.

나의 비틀거리다 기회를 놓치는 기회주의.

나의 예의바른 인색함.

나의 그리움 섞인 부러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 생기는 그 부러움은 젖은 털실처럼 차갑고 곱슬거린다.

나의 가파르고 텅 빈 수저질, 굶주림이 사라진 이후, 

나를 밖에서는 압박하고 안에서는 공허하게 한다.

나의 뻔하고 치우친 속내, 

안짱걸음을 걸으며 나를 와해시키고 만다.

나의 느린 오후들, 

시간은 나와 함께 가구들 사이를 천천히 흐른다.

나의 누군가를 버리고 떠나는 버릇,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내가 나를 놓아주지 못한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비단 같은 미소를 짓는 법을 안다.

배고픈 천사 이후 나는 누구도 나를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 '숨그네'에서 부분 발췌      


뮐러는 수용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단체로 배변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눈밭이 주체가 되어 엉덩이를 외롭게 버려두었다는 표현 같은 변칙적 은유를 쓰는가 하면 '심장삽'이나 '배부른 천사', '숨그네' 같은 새로운 언어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보다 더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자극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심장삽은 주인공이 석탄을, 그중에서도 특히 먼지가 안나는 무른 석탄을 푸는데 쓰는 도구를 말한다. 피로감이 덜한 행복한 노동을 

은유한 단어인데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데 도움을 준 환경들로 분류되어 '귀향'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희망(너는 돌아올 거야)'의 공범으로 표현된 것이다. 뮐러의 언어들은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듯 객관적이고 사실적이어야 하는 작가의 시선이 확연히 드러난 사실 이면의 감춰진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 역으로 배출됨으로써 완벽한 생명력을 갖고 그 어떤 사실적인 표현들보다도 혹독하게 고통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반면, 하루키는 어떠한가?


어둠침침한 동굴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서로 칭찬하고 서로 상처를 핥아주고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소리를 주절거리는 한심한 자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

문학의 세계에선 좋든 싫든 돈을 초월한 동기가 

일을 굴러가게 하는 거야.

설명을 안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다는 거야.

이건 싸구려 연극 같은 게 아니다. 

1Q84는 베이면 피가 나는 현실세계다. 

아픔은 어디까지나 아픔이고, 공포는 어디까지나 공포다. 

하늘에 걸린 달은 연극 소품이 아니다. 

진짜 한 쌍의 달.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때 

그림자는 지옥에 내려가 악마가 된다.

우리는 좀 더 일찍 용기를 내어 서로를 찾아야 했어요. 

그랬다면 우리는 본래의 세계에서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필요해. 

말로는 잘 설명이 안되지만, 의미를 가진 그런 풍경. 

우리는 그 뭔가에 제대로 설명을 달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면이 있어.난 그렇게 생각해.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근거 같은 게 된다는 얘기인가요?

아마도.

- '1Q84'에서 부분 발췌      


하루키가 창조한, 어쩌면 살짝 끌어다 붙힌 갖가지 이론들의 복합적인 세계는 무엇이다 정의할 수 없는 

-실제로 애매하게 표현된 절대적인, 혹은 무절제한 힘- 강력한 사고와 관념이 합체되어 만들어낸 같은 차원이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이기도 한 개성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대화들, 정의들은 지극히 현세적이면서 일상적이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로 인해 멀고 먼 우주 어느 곳에 존재하는 막연한 곳이 아닌 실제의 영상을 가진 아주 가까운 곳의 이면으로 독자들의 곁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년 전에 출판 되어 대히트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인용하자면 '온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을 우주의 강력한 힘, 혹은 에너지가 들어준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문체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두 작품을 최대한 간단하게 내 방식으로 비교하건데 뭘러가 현실도피적인 몽상가처럼 말하면서 지독히 염세적인 냄새를 풍긴다면 하루키는 가볍고 일상적으로 말하면서 세상 밖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시선을 유지하며 관조로 일관하는 인사이더와

세상의 언저리에서 혼자만의 유희를 쫒으면서도 세상의 시선을 느끼는 아웃사이더.

그 둘을 한자리에서 보는 듯하다.

접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 통하는 데가 있는 기묘한 결합처럼.

이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닮아 있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다.


인간은 산다. 단 한 번만 산다. -숨그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뮐러와 하루키가 전혀 다른 세계를 살면서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그 중심에 바로 이 문장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을 내가 쓰지 못했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키는 이 문장의 또 다른 의미를 이렇게 썼다.


나.는. 덴.고.를. 사.랑.해.  -1Q84-


이제 편안하다. 생각나는 온갖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일들을 깊이 고민하고, 반드시 만나야 할 것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나면 우울해지곤 했다. 그 때 마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나를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단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간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읽으면서 얻은 사소한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탓에 설마, 하고 눈 언저리를 두어번 문질렀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부분들. 

이 또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작품 모두에서. 그 중 하루키의 작품에서 좀 더 많이 눈에 띄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로 하여금 일직선상에 두 작품을 늘어놓게 한 가장 확실한 매개체가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다.

'숨그네'의 어린 주인공 레오의 회상을 돕는 매개체는 언제나 어떤 물건이다. 레오는 손수건에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할머니를 떠올리며 집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날 자기 빵을 나누어(?) 먹는 쥐들을 죽이면서 더 없이 사랑스럽게 그를 유혹했으면서도 막상 손을 뻗었을때 자신의 손을 물었던 어린 고양이를 죽였던 기억을 되살려낸다. 나 아니면 상대를 선택하는 순간, 그 선택이 곧 죽음이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독백한다.      


고양이가 쥐들과 똑같았던 점은,

찍찍 소리가 없었다는 것.

고양이가 쥐들과 달랐던 점은,

쥐들에게는 의도적이었고 연민을 느꼈다는 것이다.

고양이의 경우 쓰다듬으려다 물렸기 때문에 씁쓸했다. 

거기에는 강요받는 경우와 같은 그 무엇이 있다.      


'1Q84'에서의 고양이는 좀 더 상징적이고 의미가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피중인 아오마메를 '상처입은 고양이' 차원의 퍼시버인 후카에리를 '흡족한 고양이'로 표현했다거나 덴고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교차점을 '고양이마을'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찾았다는 것. 결말의 도식을 이끌어내기 위한 소제목으로 '슬슬 고양이들이 올 시각이다' 라는 문장을 내세웠다는 것, 이 정도다. 

하긴 이것만으로도 갑자기 하루키에게 급속도로 기울어진 관심과 애정이라는 저울추를 느꼈으니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한 내 집착이 남다르다는 편견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정한다, 고양이에 대한 살짝 광적인 나의 흥분을...

이유야 어찌되었든...

달 마다, 해 마다 많은 책들을 접하고, 읽고, 분석하는 와중에가슴에, 혹은 머리에 남는 책들을 만나기가 점점 쉽지 않다. 쓰는 것이 일상이 되어서 어지간한 문체나 문장에 둔중해진 탓인지 너무 많은 책들이 훙수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그 질이 하급수로 변해버린 탓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양질의 독서가 점점 힘들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행복한 독서는 영혼을 살찌운다.

이 새로울 것 없는 뻔한 진리가 가슴에 와닿는 날이...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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