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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May 03. 2016

봄날

             

오랜 친구가 봄나들이를 했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면서도

해 마다 한두번씩 안부를 묻고 서너 해를 넘겨서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맞대는 친구다. 

특별히 대접할 것이 생각나지 않던 차에 마침 잘됐다 싶어 꽁꽁 숨겨두었던 다기들을 꺼낸다.

잘 닦아두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뜻한 물로 찬찬히 씻고,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따뜻한 물을 부어 온기를 준 다음, 잔국화를 넣고, 끓인 물을 부어 향을 담아낸다.     

-어쩐 일이야?

-왜?

-커피가 아니고 차를 다 마시네?

-그렇게 됐다.      

가볍게 웃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보던 친구가 나보다 더 예쁘게 웃는다.     

-나일 먹긴 먹나 보다. 커피 보다 국화차 향이 더 좋구나 여겨진다.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너도 나일 먹는다 싶으니까 그것도 위로가 되고.

-원, 별....     

사는 것은 어떤지, 아이들에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가족들은 모두 건강한지에 대해 묻고,

그리고 나서야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만큼 늙었구나 싶다.

처음엔 자잘한 갈색 덩어리이던 것들이 조금씩 오무렸던 입들을 펼치면서 

작고 귀여운 모습들을 드러낸다. 동시에 찻물에도 물감을 타듯 은은한 노란 빛들이 번져간다.          

차를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들은 커피나 쥬스를 마실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쌉쏘롬하거나 달착지근한 커피를 마실 때는 알콜달콩 연애 이야기.

시원하고 맛이 강한 쥬스를 마실 때는 몰두하고 있는 일 이야기.

오늘, 향이 잔잔한 국화차를 마시다 보니 

평소에는 떠올리지도 않고 입에 담은 적도 없는 꿈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 시작은 요즘 뭘 하고 지내느냐 였는데 어느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관해

진지하고 차분하게 얘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친구도 신기하게 여긴다. 

오랜 시간을 만나왔어도 그 동안 내게서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인 탓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친구의 바램이나 소망들도 듣게 된다.

그랬구나. 이 녀석의 꿈은 그런 거였구나. 

나도 모르게 슬쩍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보통은 큰 소리로 말하고는 깔깔대고 웃어 버리는 평소 내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국화차 한 잔으로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기억하라, 함께 지낸 행복했던 나날들을

그때 태양은 훨씬 더 뜨거웠고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다웠지.

(중략)

모든 추억과 모든 뉘우침도 다 함께

북풍은 그 모든 것을 싣고 가나니

망각의 춥고 어두운 밤 저 편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지

네가 불러준 그 노랫소리

그건 우리 마음 그대로의 노래였고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고

우리 둘은 언제나 함께 살았었네          

-쟈크 프레베르


책을 좋아하고 , 늘 책과 함께 하면서도, 친한 친구에게 글 한 줄을 읽어주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 20년 만에, 마치 처음처럼 설레며, 심장을 두근거리며,

친구에게, 나를 기억해주는 많은 이들에게, 멀리 있지만 그리운 이에게,

쟈크 프레베르의 시를 읽어주면서 나는 행복했다.          

작가 공지영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책의 위대함을 한 마디로 말해달라는 앵커에게 그랬다지.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책을 사서 읽는 일이라고.

그냥 스쳐버릴 수도 있던 일상의 어떤 현상 속, 그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한 

과학자, 예술가, 또는 마음에 감동과 열정이 있는, 보통 사람들 속 특별한 눈빛들처럼

친구와 함께 국화차를 마시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이야기 한다.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값진 경험을 사소함 속에서 찾아낸 기쁨을 누린다.          

기억의 끈을 붙잡고 기어나오는 생각이 꼬리를 물어

오래 전 자주 갔던 찻집에서 마시던 차의 맛도 추억하고

나름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던 이런 저런 여행지에서의 차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음식이나 차 문화를 경험하게 해준 이들이 많았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왜, 언제 다 잊었을까? 

이것 또한,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는 온갖 경험들이, 순간을 넘어설 때부터 

뇌의 저장창고에서 자취를 감추는 '건망증' 증세의 일부분이겠거니 하면서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래도 기억이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이처럼 사소한 실마리로도 곧 길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빛 가운데로 나와 주니 말이다.

오랜 만에 만나는 친구와, 누군가의 관심과 배려로 인해 내게 건네진 예쁜 다기들과,

향이 좋은 국화차 한 잔에 마냥 행복해지는 날.

이런 날들이 있어 삶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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