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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Jul 02. 2017

잡생각...

                                                                                                                                        

나는 참외를 먹을 때 씨를 발라내고 먹는다. 참외의 씨라는 것이 복숭아씨처럼 큼지막한 것도 아니고 사과나 배의 씨처럼 적당부분 잘라내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서 참외를 먹을 때 마다 나름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손끝도 야물어야 하고 성정도 차분해야 가능한 일이다. 

속을 통째로 버리면 꿀처럼 달큰한 부분이 없어지는데다 잘못하면 속이 잘라져서 결국 제대로 먹게 되는 부분이 줄어든다. 칼끝을 모로 세워 살살 건드려가며 얇고 즙이 많은 속살들을 연 다음에 걸리적거리는 씨들만 발라내서 버리고 참외의 원형을 보존한 상태로 접시에 담아 흐뭇하니 귀부인 흉내를 내면서 먹는 것이 내 방식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요즘 흔한 칠레산 포도를 그리 먹는다. 이 포도는 크기와 생김새가 거봉과 비슷한데 가격이 훨씬 싸고 껍질째 먹으면 떫은맛이 입안에 남는다. 껍질이 과육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껍질 채 씹어 삼키거나 씹다가 입안에 남은 것들을 뱉으면서 먹는다.

참외 씨를 발라내거나 포도 껍질을 일일이 벗겨내는 나를 보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꽤 있다. 평소에 절차가 단순하거나 속도가 더딘 일을 질색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반전이라 여기는 듯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손님을 기다리다가 허기를 달랠 요량으로 포도를 먹었다. 열심히 껍질을 벗겨 먹다가 문득 내가 하는 일들이나 생각하는 방식에 골몰하게 되어 이 글을 쓴다. 

맡은 일과 처해진 상황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 빠른 사람, 능동적인 대처가 가능한 사람,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평가 속에서 살지만 기실 나는 느리고 차분하며 서두르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이 성격은 목표가 뚜렷할수록 더 확실하게 나타나고 집요하게 유지되는 특징을 가졌다. 반면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부분들에 대한 긴장이 지나치다 못해 강박적이다. 그런 일이나 사람을 만나면 울컥 짜증부터 솟구친다. 도처에 불확실이 날뛰는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늘 외진 방구석을 꿈꾸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잘 하는 일이 곧 좋아하는 일은 아니라고 투덜대지만 그 잘 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처럼 보이게 구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걸 잘 안다. 

참외 씨를 발라내듯 포도껍질을 벗겨내듯 일도 관계도 차근차근 고집스럽게 하면 좋은데 나 외의 다른 이들과 속도를 맞추려니 머리도 힘들고 몸도 힘들다. 그 와중에 제일 힘든 건 당연지사 내 마음이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귀찮고 힘든 과정은 남이 안보는 곳에서 몰래 하고 남이 볼 때는 그럴듯한 결과물만 내놓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도 서툴고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듣는 핀잔과 잔소리가 귀에 거슬려 그랬던듯한데 이미 몸에 익어버린 습관처럼 고치기가 어렵다. 


힘들게 손질한 참외 한 접시, 포도 한 그릇을 남들이 감탄하며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였을까? 결국 남의 칭찬을 듣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일까? 나는 본디 느리고 꾸물대는 사람입니다, 하고 뭐든 천천히 해버릴까 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감동도 일상이 되어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릴 텐데 굳이 수고로움을 더해가며 미련을 떨지 말아야지 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이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다. 나는 내 마음을 잘 안다. 결국은 대강이 싫고 이왕지사 시작한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럴듯하고 괜찮아 보여야 한다. 남들이 몰라줘도 상관없고 안다고 별다를 것도 없는 나의 수고로움을 통해 얻는 내 만족이다. 해서 저기 버려질 것들로 쌓이는 씨들과 껍질들은 내 시간이고 노력이며 사랑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위해 버려지고 사라질지언정 지루하고 만만하기는 죽기보다 싫다고 외치는 내 마음의 비명이다. 

서른 언저리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으니 새롭게 시작한 삶은 이제 얼추 청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 길로 더 갈 것인지 다시 방향을 바꿀 것인지 고민을 시작해야겠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여겼는데 이조차도 남의 눈에 맞춘 것은 아닌가 싶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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