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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Apr 02. 2019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 집엔 22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준비하는 게 좋겠다. 갈등은 있을 것이고, 나도 그 갈등에 한몫하고 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시작해본다. 갈등에 기여하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만큼 다가갔으니 그만큼의 피드백을 받았겠지. 지금까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말을 해왔고, 이제는 답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답은 말과 글로 오기도 하지만 이름 없는 감정으로, 묘한 분위기로 오기도 한다.


갈등에 대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외면하고 혼자만의 감정을 쌓아 간다. 어떤 이는 대화하고 변화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갈등에 대해서 나는 외면하고, 또 다른 어떤 갈등에 대해서 나는 대면한다. 누구도 모든 갈등을 대면할 수는 없다. 어떤 갈등도 터져 나오자마자 해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상황을 그냥 두고 견디는 것과 내 생명에너지를 사용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 사이에 수많은 계산과 시간이 들어간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물음

[A] : 한가해서 그래?
[B] : 나 같으면 그냥 안 보고 말래.

갈등을 그냥 외면해도 괜찮을 텐데, 갈등을 이유로 불편했던 이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난 왜 그 갈등을 대면하려 하는 걸까. 왜 사인 간의 갈등을 모두의 이슈로 삼으려 하는 걸까. 


스무 명이 함께 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사적이고 공적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공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 둘이 했던 대화가 넷에게 와전되고 여덟에게 해석되는 방식이다. 둘은 오해를 풀었지만 여덟 중 넷은 맘대로 판단하고 끝나버린 일. 그 무심한 판단이 다시 돌아와 내 목을 조른다. 내가 딛고 서있는 땅은 그렇게 대책 없이 댕강 두 쪽으로 갈라진다. 수없이 조각난 땅 가운데 방치된 한 조각의 땅에 겨우 발 딛고 서있다. 메아리는 끝나지 않고 계속 울려 퍼지고, 해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더 잘 살고 싶다. 

내 답은 이것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편하고 끈끈하게 지내고 싶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단단하고 드넓은 안전한 땅 위에서 자유롭게 드러눕고 싶다. 어떤 관계는 벚꽃 필 때 꽃놀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과 내가 둘 다 행복할 찰나에 만나 서로의 행복에 취한다. 어떤 관계는 비 올 때 함께 비를 맞는다. 이런 관계에선 한 사람이 슬프고 힘들 때 다른 한 사람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듣고 공감한다. 함께 비 맞으며 우산을 가지러 가는 관계를 꿈꾼다. 

[C] : 응, 너 힘들구나? 그럼 너 혼자 잘 이겨내 봐.
[D] : 응, 너 힘들구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힘든 네 곁에 내가 있어볼게.


그래서 나에겐 규칙이 필요하다. 복잡한 세상에서 적어도 우리끼리는 덜 부딪혀 보자는 약속. 우리끼리는 덜 쿵쿵거려보자는 약속. 서로에게 덜 상처 주는 모습, 더 나은 모습으로 존재하자는 최소한의 약속이 내겐 필요하다. 


더 나은 규칙을 추구한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이유를 묻는 이유다. "왜 지키지 못했어?" 그래야 조금은 나은 규칙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규칙이 없으면 불편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방치된다. 서로에게 불평하고 뒷담 하며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다.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니. 관계 형성에 실패한 사람은 그냥 우리를 떠나 버리게 된다. 그런 장면이 싫다. 지금의 나는 다른 커뮤니티를 찾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여기가 좋다. 우리 집 식구들 너무 소듕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다. 조금 번거롭고 지난하지만 어떤 부분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시간을 통해 당신과 나 사이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당신은 나와의 다름에 어떻게 대응하고 싶은지 알고 싶다. 이런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채 던져진 '우리는 가족이니까', '친하니까'라는 메시지는 공허하다. 끊임없이 알아가고 싶다. 우리는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오늘도 의견을 내고 피드백을 기다리며 나름의 노력을 해본다.


갈등을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마음을 내어주고 변화를 하지만, 어떤 이는 스스로의 경험과 판단에만 국한해 변화를 허락한다. 조금 아쉽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행운을 당신과 함께 누리고 싶기 때문에 아쉽다. '나'라는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 서로 만나 충돌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빅뱅이다. 그렇게 수억 개의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혁신'이라는 그것. 빅뱅은 어느 한순간에 반짝이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구가 공전 자전하듯 느리게, 하지만 되돌릴 수 없이 강력하게 서로를 흡수한다. 나는 늘 빅뱅을 기다린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스스로가 완벽할 것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완벽한 사람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모두 대단한 착각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완벽한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완벽이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비가 되고 싶다' 같은 허무한 꿈이다. 이룰 수 없는 기준은 스스로에게 좌절과 실망만 준다. 그런 고통스러운 잣대는 스스로 버려버리면 좋겠는데, 자존심 때문인지 버리지 못하고 타인에게 들이민다. '나는 완벽해.',  '내가 틀렸을 리 없어.' 네가 뭘 모르겠지.' 타인을 치부하고 비난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남는다. 이런 생각 기제를 가진 사람은 빅뱅에 참여하기 어렵다.


나도 완벽하지 않다. 내가 혼자 제안한 모든 것은 늘 무언가 아쉽다. 누가 무엇을 제안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탁월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엔 아쉬움이 남는다. 완벽함의 개념이 허상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상태를 바란다면 함께 하자고 얘기해주면 좋겠다. 규칙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만든 규칙은 매우 많이 아쉬운 규칙이 된다.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 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 반영될수록 덜 아쉬운 규칙이 된다. 


보라씨가 무서워요.


갈등은 창조된 것이 아니다. 거기 존재하는 갈등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 제기한 사람은 가장 먼저 발견했거나, 발견한 사람 중 가장 먼저 말한 것뿐이다. 이 사실을 놓치면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무서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았더라도 갈등은 존재해왔다. 문제제기가 없으면 갈등이 ‘자연스럽게’ 없어질까? 방치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은 사람, 혹은 관계다. 


문제 제기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두려워하길. 당신에게 삶의 기준이 있는가? 당신은 스스로가 만든 기준에 솔직한가? 그렇다면 내가 무서울 이유는 없다. 나에게 당신의 기준을 설명해준다면 정말 고맙겠다. 아니라면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인 것뿐.


내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웃음과 용기를 주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번거로움과 고통을 준다. 내가 뭔가 특별해서 이렇게까지 내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일에 나만의 시각과 의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에너지가 없다. 당신도 아마 비슷할 거야. 우리는 미래도 준비해야 하고, 현재도 행복해야 하고, 과거도 돌아봐야 해서 늘 바쁘다. 그거 아는데,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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