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체 Sep 10. 2021

심리검사를 받았다.

원가족과 원활하게 스무스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혼자서는 고민할 방도가 없어서 서울심리지원센터에 상담을 신청했다. 원가족이 없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될까? 머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내가 홀로   있을까?


심리검사는 500문항을 풀고, 또 몇십 개의 문항을 풀고 주관식으로 마무리하느라 2시간을 꽉 채웠다. 심리검사 문항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있었고, 짜증 나는 문장도 있어서 에너지 소모가 컸다.


문항에 답하며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그중 좀 놀라웠던 사실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가난이라는 점이다. 평생 원룸에서 살게 되면 어쩌지? 지금은 운이 좋아 역세권에 살고 있지만 곧이어 저 멀리멀리 깊은 곳, 버스를 두어 번 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곳으로 이사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어쩌지? 평생 내 차 한번 가져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가족이 없으면 어쩌지?


이미 원가족과 분리된 사람들이 보면 뭘 그런 걸 걱정하냐고 할까? 그런 걸 걱정하고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어서 부럽다고 할까? 어떠신가요? 스스로 원가족과의 이별을 택하신 분들께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화날까요?


여러모로 두려움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인데 마주할 시간이 없다. 일이 너무 많다.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김포만 많은 걸까? 작년보다 훨씬 많아진 피해자와 상담건수를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막힌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은 9시부터 6시인데 그 안을 아무리 쪼개도 일이 다 들어가질 않는다. 상담하고 동행하고 자료 찾아보고 전화하면 하루가 다 간다.


매년 늘어나지 않는 국비 도비 시비 예산에도 숨이 막힌다. 이럴 때 예산이라도 있다면 일을 좀 수월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예산 소진을 대비하는 회의는 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 시간 아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특히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와 성폭력 피해자에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무료법률구조사업 예산이 바닥나서 갱장히 힘들다.


일이 바빠지는 것은 성폭력의 종류와도 연관이 있다. 개인과 개인이 사적으로 만나 발생한 성폭력을 대응하는 것보다 일터에서 업무관계로 혹은 공적으로 만난 성폭력을 대응하는 것에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뭐가 다르냐면 사적 만남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경찰 고소로 시작하는 형사절차를 밟고 재판이 끝나면 민사로 가는 방향이다. 이에 비해 공적 영역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형사절차는 기본이고 고용노동부 신고, 인권위 신고가 추가된다. 뿐만 아니라 재발방지를 위한 여러 단위들을 다양하게 조직하여 만나고 설득하여 시스템 변화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가 나는 건 공공분야의 성폭력이다. 피해자는 우리 상담소에 전화를 걸기까지 기본 3-5 곳에 전화를 건다. 여기로 전화하면 저기로 전화하라고 하고 저기에 전화하면 또 다른 곳을 안내해준다. 그리고 또 전화하여 결국 처음에 전화했던 곳으로 연결된다.


피해자가 어디에 자신의 피해를 말해야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1차적인 이유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더 문제적인 2차적 이유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기관은 아니니까 아마 거기일걸요?"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전화를 넘기는 것이다. 물론 이해한다. 그렇다고 "제가 알아보고 전화드릴게요"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내가 전화해서 "여기 성폭력 상담소인데요."라고 소개하면 상대방은 긴장한다. 피해자가 전화했을 때는 꿈쩍 안 하던 기관들이 내가 전화하면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자신이 가진 권한과 한계를 설명해준다. 흥 챗. 나도 성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기에 킹받는다. 그래도 이해는 됨.


특히 조직 내 성폭력은 책임이 중요하다. 가해자만 잘라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성폭력은 시스템과 문화에 기인한다. 조직과 시스템을 점검하고 바꿔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지. 그래서 또 결국 내가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얘기를 쓰고 싶은데 아직은 피해자에게 동의를 못 구했다. 오늘 여러 곳에 전화했다. 다들 나름의 답변을 주겄지? 그 답변 다 들어보고 그나마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조직 내 성폭력은 책임이 정말 정말 중요하다. 권한이 있는 관리자는 판단해야 한다. 피해자의 말을 믿겠다는 판단을 해야 한다. 피해자의 말을 믿고 나야 2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볼까? 수사기관도 아닌 직장상사가 가해자의 행위를 어떻게 입증하겠나? 관리자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와 같이 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물어보고 피해자의 경험을 들으면서 어떤 게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함께 찾아야 한다.


가해자는 대부분 행위를 부인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말이 거짓말로 둔갑하게 된다. 가해자의 말은 잘 걸러서 들어야 한다. 이때 제대로 판단 못하고 가해자의 말을 믿는 순간 직장상사는 피해자의 말을 거짓말로 만들게 된다.


혹은 둘의 말이 모두 맞다고 판단해버리면 그때부터는 그냥 상황 끝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꽉 끼어 버리는 거지.


퇴근길 글쓰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내릴 시간이다. 어째 매일 숙제를 받아 집에 가는 것 같아. 내일은 꼭 밀린 상담일지 다 써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야식이 약으로 조절된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