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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Sep 01. 2023

야식이 약으로 조절된다고?

내가 끊임없이 먹고 있는지 몰랐다. 인지하지 못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ADHD진단 후 약을 복용하면서 하루 종일 먹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요즘은 밥 먹는 것 이외에 낮에는 뭘 잘 안 먹는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배가 안 고파서 점심을 억지로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날 정도이다. 그러면 아침을 조금 덜 먹거나 점심을 건너뛰면 되지 않겠냐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좀 어렵다. 먹던 가닥이 있어서 그런지 세끼 식사를 안 챙기면 큰일 나는 줄 안다. 그래도 먹는 게 좀 줄었다고 몸무게도 좀 줄었다. 


문제는 야식이다. 평생 야식을 먹었지만 최근에는 심해졌다. 어쩌면 심각해진 게 아니라 인지하게 된 걸 수도 있다. 컵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치킨을 시켜 먹기도 한다. 초콜릿이나 과자 등 집에 있는 주전부리는 아무거나 먹고 본다. 그렇게 먹어야 먹다가 잠이 든다. 먹지 않고 버티면 잠을 못 잔다. 밤에 먹어야 잘 수 있다니, 뚱뚱이로 살아야 된다는 저주에 걸린 걸까.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삼십몇 년을 살았으면서 아직 먹는 것 하나 조절 못하나? 왜 조절하지 못할까. 왜 그냥 좀 곱게 잠들 수 없는 것인가? 날씬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전 몸무게라도 가보고 싶은데. 정신과 진료시간에 꼭 말씀드려야지 다짐하며 메모한다. 자기 전에 자꾸 뭘 먹는다고. 


모든 ADHD 성향 사람들 각자 가자 힘든 부분은 다를 것이다. 나는 루틴을 만드는 게 어려워서 힘들다. 그냥 제발 매일을 똑같이 반복하며 살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일상이 똑같아서 지겨우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올시다. 제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게 해 주세요. 단 하루라도 좋으니 반복하게 해 주세요. 


남들과 하는 시간약속, 예를 들면 출퇴근시간이나 약속시간을 지키기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나와의 약속이다. 잠이 드는 시간도 자기 맘대로, 일어나는 시간도 자기 맘대로 라 대중이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 잠드는 게 점점 더 싫어졌다. 내일이 오는 게 싫어서 늦게 자면 다음 날 또 늦게 일어나는 악순환.


1월부터 다닌 정신과에서도 수면이 계속 이슈였다. 처음에 수면 관련 약을 썼을 때는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쳐서 기절시키듯 잠에 들었다. 9시에 약 먹으면 10시 반에 기절. 다음 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면 몸도 너무 가뿐하고 기분도 좋아지더라.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또 어느 날부터 침대에 3~4시간을 누워 있어도 잠에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하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내 몸은 마치 배고프다면서 반찬투정하는 아이처럼 답답하고 한심했다. 수면 관련 약을 늘려 보기도 했지만 수면양만 늘지, 잠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여전했다. 


지금 다니는 병원의 선생님도 수면위생을 강조하신다. 

<보라가 지켜야 할 수면위생>

1. 24시간 중 1시간 이상은 햇볕 쬐기
2. 24시간 중 1시간 이상 걷기
3. 24시간 중 자는 시간을 스스로 정해두기 (ex. 1시~9시)
4. 정해 놓은 시간(1시~9시) 외에는 눕거나 자는 것 금지
5. 잠자리에 들기 4시간 전까지(21시까지), 걷는 것과 먹는 것은 끝내기
6. 잠자리에 들면서 스스로를 이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하기 (ex. 명상, 촉감 느끼기, 눈 감기, 라디오 듣기, 책 읽기)
7.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으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을 꺼내어 노트에 적기


1, 2, 3, 4, 6, 7번은 껌이었다. 문제는 5번이다. 의사 선생님은 밤마다 군것질로 폭식해야 잠드는 저주에 걸렸다는 내 얘길 가만히 들으시더니 ADHD약효가 떨어져서 그럴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워주셨다. 뭔가 먹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오는 것 같다고. 충동을 해소해야 이완이 되면서 잠들 수 있는 것 같다고.


네에? 그럼 저 지금까지 ADHD 때문에 야식 먹은 거예요?


ADHD약은 정말 신기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복용하면 정신이 딱 차려진다. 하고 싶은 일을 당장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침에 힘들지 않게 눈이 번쩍 떠지고, 오전에 비몽사몽 없이 남들이 말하는 게 다 이해가 되고, 내가 걷는 것과 먹는 것, 말하는 것까지 다 인지가 되고 조심할 수 있게 된다. 이 고마운 약의 지속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던 걸까. 


ADHD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내 인생에 주고 있었다. ADHD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건지, 약이 영향을 미치는 건지 이젠 헷갈리지만 ADHD약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됐고, 지각이 줄었다. 오전도 정신이 깨어있는 채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서른 넘어서도 하루 종일 '배고프다', '졸리다'는 1차원적인 말을 입으로 발설하고 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했고, 멈출 수 있었다. 뭘 먹을 때 배가 불러온다는 게 인지되고 먹는 걸 중단할 수 있게 됐다. 일할 때 수십 개나 띄워놓던 인터넷 창을 5개도 안 되는 숫자로 줄였으며,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끊임없이 점프를 뛰고 발산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 모든 발견이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는데 뭐? 야식조차 ADHD의 영향이라고?


스스로를 조용한 ADHD라고 생각했다. 충동행동은 별로 없고 주의력 조절만 잘 안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네. 그게 아니었네요. 크나큰 오해였네요. 먹는 것, 일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 ADHD 충동행동이었다는 소식입니다.


ADHD를 내 인생에서 아예 도려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ADHD가 싹 사라져서 나도 약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에도 잘 일어나고, 머리를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면! 


슬프게도 아직 ADHD에 대한 치료제는 없다. 안경으로 시력을 보조하듯이 약으로 주의력과 충동을 조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한테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되냐고 물어보면 안경을 평생 착용하듯 약도 평생 복용해야 한다고 답한다. 치료제가 아니라 보조제일뿐이라고.  


ADHD진단을 받을 때 치료제가 없다는 얘길 들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ADHD와 평생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어차피 내가 ADHD에게 이별을 고해도 ADHD는 이별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래도 좀 무섭긴 했다. 평생 약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니?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게 됐다. 지금까지 바꿀 수 없다고 포기했던 내 모습들이 ADHD 때문이었다잖아? 그런데 약을 먹으면 그 모습을 인식하고 바꿀 수 있던데? 오히려 좋은 것 아냐? 평생 약을 먹으면 어때? 부작용이 있는 약도 아니라던데! 


내겐 오히려 희망이 생긴 거였다. 진단 이후로 8개월 간 그랬듯 앞으로도 ADHD가 내게 남긴 모습들을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바꿔내며 살아갈 것이다. 


과대포장된 선물 같다. 포장을 제거하듯 ADHD의 영향을 하나씩 걷어내면 그 속에 감춰져 있던 내 모습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인생은 선물이라더니, 네가 내 선물의 포장지였니? ADHD? 널 벗겨내면 그 안에 내가 있는 거니? 널 벗겨내면 나 이제 야식 안 먹는 거니? 너무 기대된다,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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