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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Oct 07. 2021

성폭력, 당장 신고하기 어렵다면

성폭력을 당하셨나요? 많이 놀라셨죠? 저랑 같이 차근차근 대처해봅시다. 힘드시겠지만 이건 당신의 인생이라 누가 대신해줄 수는 없어요. 조금 힘을 내주셔야 해요. 초기 대응만 해 놓고 좀 쉽시다.


하지만 경찰 신고는 쉽지 않습니다. 신고라는 것 자체가 무섭죠. 앞으로 계속 가해자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시라면 고민이 더 많이 될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되고 가해자의 보복도 무섭고 신고하기 어려운 이유는 너무나도 많죠.


당장 신고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건 당시에 바로 신고하는 사람보다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당장 신고하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신고하기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좀 있습니다. 증거가 살아있고 기억이 생생한 지금 할 수 있는 일. 지금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 증거 보관하기

가해자가 당신을 만졌나요? 성추행 강제추행 기습 추행을 당했나요? 추후에 DNA 검사하면 다 나옵니다. 가해자가 만진 옷과 속옷들은 종이가방에 따로 넣어두세요. 비닐가방은 통풍이 되지 않아 DNA에 손상이 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대로 그냥 종이가방에 넣어두시고 당분간은 입지 않는 걸로 해요.


두 번째. 의료 증거 남기기

가해자가 당신을 강간했나요? 당신의 성기에 손이나 물건을 넣는 유사강간을 했나요? 씻지 말고 병원으로 바로 가세요. 일반 병원보다는 해바라기 센터로 찾아가시면 응급한 성폭력 상황 대처경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더 정확한 도움과 검사를 받으실 수 있어요. 해바라기센터에 찾아가기가 어렵다면 가까운 병원에라도 꼭 가셔야 돼요. 의료진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꼭 말씀을 하시고요.


여기까지 급한 증거수집을 하신 겁니다.
한 숨 돌리시고요.
다음 할 일 또 말씀드릴게요.


세 번째. 상황을 기록해야 돼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카톡이나 문자, 전화로 다 얘기하는 겁니다. 전화는 물론 녹음을 하셔야 되고요. 사람에게 얘기하기 어려울 때는 종이에 적으세요. 혹은 카카오톡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나한테 어떤 성폭력을 어떻게 했는지 상세하게 다 얘기하면 가장 좋습니다. 기록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면 되지만, 특히 언제, 어디서, 가해자가 어떻게 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어제 술집에서 걔가 나한테 이렇게 했다’ 이런 식이 아니라 ‘2021년 8월 29일 저녁 20시부터 21시 사이에 서울 신촌에 있는 술집, 술집이름, 주소, 어디에 있는 테이블 그중에서 내가 앉은자리는 어디인데 가해자는 여기 앉았고' 이런 식으로요. 다 말하고 다 남기는 겁니다.


목격자, 그날의 분위기, 시간 순서대로 대화의 흐름, 그날 그 사람을 왜 만났는지, 누구와 함께 만났는지, 당신께서 느꼈던 이상한 낌새, 그 성폭력을 피하려고 당신이 했던 행동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당신에게 한 일들, 가해자가 어느 손으로 당신의 몸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왼손이었는지 오른손이었는지, 당신의 몸을 만질 때 1초를 만진 건지 10초 넘게 만졌는지, 어깨를 주물렀다면 몇 번이나 주물럭 거렸는지, 볼에 뽀뽀를 했다면 왼쪽 볼이었는지 오른쪽 볼이었는지, 당신의 성기에 손을 넣었다면 왼손 오른손 중 어느 손의 어떤 손가락을 넣었는지, 그때 그 사람의 다른 손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다 남기는 겁니다.


그때 당신이 느낀 당황스럽고 무서운 느낌, 화나고 짜증 나는 느낌, 어땠는지 다 쓰고 다 말하세요.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말을 했고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 만약 대처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날 그 자리는 결국 어떻게 종료하게 됐는지 다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도 됩니다.

그날 있었던 장소에 대해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 그려요. 원래 알던 사람이 가해자라면 그날 상황을 그리고요. 그날 가해자를 처음 본 경우라면 가해자의 얼굴 특징과 이나 몸 특징, 옷차림, 가방, 소지품에 대해서 다 그리세요.


가해자의 집이나 다른 장소로 끌려갔다면 그 끌려간 장소에 대해 생각나는 걸 그리세요. 그 방에 있던 액자, 테이블 모양. 영화 테이큰에서 딸이 끌려갈 때 자신이 본 것들을 아빠에게 말로 소리치듯이 그렇게 남기는 겁니다. 나중에는 생각이 잘 안 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이 힘드시겠지만 나중에 기억이 조각나거나 다른 기억과 섞일 수가 있어서요. 지금 하시는 게 가장 좋겠습니다. 물론 나중에 하셔도 돼요.


여기까지 하셨다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을 거예요.
한 숨 돌리시고요.


네 번째. 성폭력상담소에 전화하기

이제는 지역의 성폭력상담소와 상담을 해 나가면서 사건을 다루시면 되겠습니다. 성폭력상담소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신다면 24시간 운영되는 여성긴급전화 1366으로 전화해서 물어보셔요. 모든 성폭력상담소에서 피해자를 지원합니다. 경찰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담을 거절하는 상담소는 없습니다. 경찰 신고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상황이 불안하고 무섭고 걱정되시잖아요?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해도 되는지 판단을 하려면 정보가 부족할 거예요. 당연하죠. 처음 겪는 일이니까요. 여러 번 째라고 해도 익숙하게 대응하긴 어려울 겁니다. 저번이랑은 조금 다를 거고, 당황하고 놀라셨을 테니까요. 주변에 지인들에게만 물어봐서는 정확한 정보를 시기적절하게 얻기는 어려워요. 꼭 상담소에 연락하시길 권합니다. 여기까지 성폭력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친구나 지인이 성폭력을 당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응해주시면 됩니다.


이 대응에 따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면

여성긴급전화 1366에 전화하시고요!


마지막으로 성폭력은 나이, 직업, 학력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거기에 당신의 잘못은 없습니다. 가해자가 100% 잘못한 겁니다. 가해자랑 둘이 술을 마시고 취했다고 해서, 밤에 내가 혼자 돌아다녔다고 해서, 성폭력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창피해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성폭력을 당해서 창피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당신께서 나이가 60이 넘었다고 해도, 당신이 결혼을 했어도, 당신이 가해자를 좋아한다고 했어도 이 성폭력에서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와도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밤늦게 돌아다닐 수 있고,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며 노출을 해도 됩니다.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성폭력은 가해자의 잘못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 잘 풀릴 거예요.


영상 보러가기 ▶ https://youtu.be/oA9Xo4POk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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