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가난에 대한 모든 얘기가 평범하고 지루하다. 지긋지긋하다. 서른다섯 1인 가구, 아직도 내 일상의 너무 많은 부분이 가난 때문이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성별이나 성적 지향도 상관이 없고 나이나 직업도 상관이 없다. 기분 좋은 장소에서 만나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웃고 어렵게 꺼낸 고민과 생각을 나누며 함께 돌파 방법을 찾아보는 시간을 좋아한다. 혹은 저번 만남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을 각자의 일상에 적용해보고 다시 만나 평가와 감상을 나누는 생산적인 시간도 좋아해.
코 시국이 끝나는 와중에 사람들은 서로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데 어째 난 좀 작아져있다. 누굴 만나려 해도 돈이 필요한데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온다.
맛있는 걸 함께 먹고 싶고 아주 작더라도 선물을 사주고 싶다.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시민단체 활동가, 자영업자, 가난한 정치인이기 때문에 더 그런 걸까. 밥이라도 혹은 커피라도 한 잔 사주고 싶고, 후원계좌로 후원금을 입금하고 싶고, 사무실에서 쓸만한 휴지라도 분위기를 밝혀줄 화사한 화분이라도 그저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다.
진짜 제발 부담을 내려놓으라고 말해주는데 몇 년째 같은 말을 듣는 입장에선 그게 참 어렵다. 이미 내가 당신들께 받은 것들을 생각하면 그게 그럴 수가 없어. 나도 그냥 함박웃음 지으며 한아름 받고 또 받고 그냥 그렇게 해맑고 즐겁게 받고 싶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인데 어쩐지 정말 어려워. 내가 너무 많이 받았나 봐.
이유는 낮은 자존감이겠지. 어디 그뿐만이겠나. 애초에 받을 일 없었고 받을 줄을 몰랐지. 가끔 따뜻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니 관심이니 선물 같은 것들을 받을 때면 그저 좋아서 쩔쩔매다가 '그래 나도 언젠가 꼭 이 사랑을 갚아야지' 굳게 결심하는 게 전부였지. 아무리 노력해봐도 갚을 수 없었고 나중엔 내가 무슨 노력을 했냐며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거지. 그렇게 굳게 결심해서 뭐하냐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공수표만 날리는 사기꾼이라며 나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다며 그렇게 복잡한 세상 속 어느 한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거지.
아마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 선물, 음식, 돈이 아니어도 말로 표현해도 될 텐데.
어쩌면 내 미래소득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것도 한몫할지 몰라.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많이 벌겠지. 그럼 그때는 정말 이 사람들에게 이것도 해 주고 저것도 해주고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예산으로 만나는 연습을 해야 하려나. 근데 아무리 아껴도 밥 먹고 커피는 마시잖아? 근데 혼자 있어도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지 않나? 그럼 친구 만날 때는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혼자 있을 때는 굶을래?
수십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이런 고민을 한다. 점심을 굶고 급식비를 모아 노래방 가던 중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먹을 점심값을 모아 옷을 사던 고등학생 시절, 술값을 모아 안경을 맞추던 대학생 시절에 난 여전히 갇혀 있는 것 같네.
학교와 회사, 수많은 동아리와 스터디 모임, 창업과 시민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내 마음에는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산더미 같은 빚으로 턱턱 쌓여 있다.
머리로는 나도 알아.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 바라고 잘해준 게 아니라는 거. 혹은 그땐 바라는 게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아니라는 거.
그래도 난 여전히 성공해서 님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심을 부리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어린 선비처럼 당신들에게 금의환향하고 싶어. 여전히 초라하고 가난한 내 모습을 들키기 싫어. 그래서 그렇게 만날 때마다 뭘 사주고 싶어. 만약 이 고민이 내 고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고민이었다면 '주변 사람들을 더 믿어보라'는 무례한 조언을 턱턱 할 텐데.
나도 날 어찌할 수가 없어. 가진 것 없는 내 모습을 인정할 수가 없어. 아직도 내 마음속엔 저만치 성공해서 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해.
당신 덕분에 힘든 시간 버텼어. 가진 것도 없고 마음까지 가난한 나를 돌봐줘서 고마워. 오늘도 나는 당신들에게 만나자고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허공에 글을 써. 미안하고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