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술을 많이 마셨던 이유

2023. 2. 2. THU.

by 보라체

나의 첫 술은 소주였다. 중학교 2학년이었고 부모님과 동생들은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 2시. 빛이라곤 깜빡이는 모니터화면뿐인 어두운 거실에서 버디버디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내 친한 친구. 우리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빠가 언제 들어올지, 들어와서 뭐라고 할지, 혹은 어딜 때릴지 같은 공포를 공유하며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간절히 주고받았다.


우리는 부모뿐만 아니라 가족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었다. 친구에겐 오빠가 있었지만 둘은 말을 섞지 않았고 밖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모른 척했다. 집에 들어와도 나 왔어, 어서 와 같은 인사 따위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둘이나 되는 동생이 있었지만 엄마는 나와 동생을 차별하고 있었으니 나는 겉돌았다.


우리는 다른 반이면서도 각자의 수업시간에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학원에서는 옆자리에 앉아 필담을 나눴고 학원차를 따로 타기가 싫어서 두 시간을 돌고 돌아 서로의 집까지 걸어 다녔다. 그러면 집에 가는 동안 더 얘기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버디버디로 얘길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내 인생에는 출구가 없겠다는 답답함이 몰려왔던 것이다. 새벽 내내 부모 욕을 해도 삶은 바뀌지 않았고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희망도 빛도 돈도 없는 삶. 숨 쉬기가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급하게 냉장고를 열어서 스캔했다. 내 속을 풀어줄 것은 무엇일까. 반 병 넘게 남은 소주. 오늘은 네가 나를 좀 식혀줘야겠다. 냉장고 문을 닫지도 않고 뚜껑을 조용히 돌려 따선 꿀꺽꿀꺽. 그때 알았다. 와 씨 나 술 존나 쎄네.


날라리, 일진들이 술을 마시로 다닐 때 좀 부럽기도 했지만 뭔가 나만 아는 우월감 같은 게 있었다. 난 술 존나 쎄니까. 너네가 마셔봤자 난 안 부럽다. 고3을 끝내고 수능까지 끝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마셔보니 술이 세다는 건 착각이었다. 술은 어른들에게 배워야 한다던데, 나는 어른에게 배우지도 못했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부탁해야 하나?


이후에 몇 년을 개가 되어 살았다. 술을 마시고 여기저기 토하고 또 마시고 이불에 쉬하고 또 마시고 길에 눕고 저녁 6시부터 새박 6시까지 밤을 새워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해장술 마시고 어제 마시고 오늘 마시고 내일도 마시는 삶.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는 삶. 술독에 빠진 대학생활. 엉엉 울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해서 당장 나를 데리러 오라고 고래고래. 주량은 조금씩 늘더니 나중엔 2병 3병까지 마시고 또 취하고 정신을 잃고 정말 진상이었다.


그야말로 자유의 맛 같았다. 부모고 성적이고 대학입시 아싸의 삶 모든 걸 떨쳐버린 달콤하고 정신없는 맛에 내가 가진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덕분인지, 지금은 술을 못 마신다. 몸에서 안 받아준다. 정 마시고 싶을 때는 무알콜을 마실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 이렇게 수년을 보내고 나서야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셨나.


다들 술을 왜 마실까? 오랜 시간 갖고 있던 질문에 한 가지 답을 찾은 것 같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예전의 나와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마음에 대해 얘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 보니 너무 쉬운 답, 솔직해지려고 술을 마셨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 서로에게 솔직해지려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마음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에 대해서, 수능을 망친 나에 대해서, 매번 실패하는 짝사랑에 대해서, 나보다 예쁘고 날씬하고 인기 많은 친구들에 대해서.


술을 마셔야 표현할 수 있었다. 너 공부할 때 좀 멋있더라는 이야기. 너 저번에 어려운 일 해결할 때 멋있었다는 이야기. 네가 참 궁금하고 너한테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 네가 요즘 좀 힘들어 보인다는 이야기. 그런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너를 위해 흘리는 눈물 같은 것.


이후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면서 술 없이도 진심을 주고받는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 왕도는 없었다. 그냥 할 일을 해내야 했다. 네가 좋다는 고백을 맨 정신으로 말해야 했고, 네가 날 감동시켰다는 오글거리는 멘트를 맨 정신으로 해야 했다. 흐르는 눈물을 찍어 보내보기도 하고. 편지나 카드에 본심을 써보기도 했다. 상황에 맞는 표정을 적극적으로 짓는 것도 중요하더라.


이 노력들은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실패할 때도 많았다. 여전히 분위기가 좋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술 생각이 난다. 애초에 술맛을 모르는 사람도 아닌걸. 맥주, 와인, 꼬냑, 사케, 위스키, 칵테일, 막걸리 두루두루 좋아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더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술 없이도 솔직해지는 연습을 할 테니 주류회사에서는 보다 개발에 매진하여 다양한 무알콜 주류를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무알콜막걸리, 무알콜꼬냑, 무알콜사케 하하하


그래서 오늘 기분은 어떻냐고? 감정일기니까 말해보자면 기분이 구리다. 조울증약으로 바꾼 뒤 ADHD 증상에 물이 올랐다. 하루에 네 번이나 여기저기 꽝꽝꽝 부딪히고 일이 버겁게 느껴지고 할 일이 많은데도 일을 또 미뤄 일을 보탠다. 월경 전증후군까지 겹쳐서 더 헷갈린다. 병과 나를 구분 지으려는 시도는 내일도 계속될 예정!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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