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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Feb 18. 2023

아이의 자폐, 인정하기 vs 부정하기

'성폭력 사건쯤이야'라고 말하는 어떤 청소년들이 있다. 오늘은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몰랐던 청소년과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닌가, 그 부모와 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는 상담소에 올 때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 주제를 준비해서 갖고 왔다.


"오늘은 제가 왜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기 어려운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오늘은 제가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왜 많이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오늘은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오늘은 상담 4회기 차,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는 아무 주제도 가져오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는데 반응이 없다. 의자 등받이에 축 늘어진 채로 반쯤 미끄러져 앉아 양쪽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눈을 감았다.


"오늘 상담소 오기 싫었나요?"
"네."


"땡땡님, 그거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여기 오기 싫으면 안 와요. 땡땡님도 그렇게 해도 된답니다?"


그의 눈이 커진다.


"오기 싫은 날에는 저한테 연락해요. 오늘은 쉬겠다고요. 상담은 땡땡님을 위해서 진행되는 거예요. 땡땡님한테 상담이 필요 없거나, 땡땡님이 상담을 받고 싶지 않다면 여기에 올 필요가 없어요."


다른 상담샘들도 내담자에게 이런 말을 할까? 잘 모르겠다.


"선택지가 두 개 있어요.
땡땡님이 선택해 볼까요.
1번. 지금 집으로 간다.
2번. 주어진 시간 동안 저랑 얘기를 나눈다.


집에 가기는 싫다고 하여 다시 상담을 이어나가려는데 아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 나오고 있다.


"땡땡님.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땡땡이는 시원하게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을 말로 꺼낸다.


"지금 상담실에서 저랑 둘이 앉아서 얘기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땡땡님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면 저는 어떨 것 같아요?


선생님이 당황스러울 것 같다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는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는 내게 수차례 고백해 왔다. 본인 스스로를 아스퍼거증후군이라 생각한다고.


다른 사람들은 인사치레로 빈 말을 한다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없으며, 명령이나 지시, 규칙에 따를 수가 없다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 중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내 기분이 어떤지, 다른 사람들 기분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단다. 현실세계에는 가족과 친구, 연예인 포함하여 관심 가는 사람이 1명도 없으며 오직 세계문학과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고. 그는 이미 작년에 아스퍼거증후군으로 진단을 받았다.


내가 정말 어렵다고 느끼는 건, 그의 어머니가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녀가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갖고 있다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고 슬프고 복잡하고 어려울까 싶다. 할 수 있다면 더 많이 이해하고 싶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은 그 마음을 내가 너무 모르는 걸까? 나는 자녀도 없고,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자녀도 없어서 너무너무 모르는 걸까?


그렇지만 15년을 부정했다면, 너무 길지 않나? 앞으로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어머님.


그는 표정이 없다. 어느 날엔 웃는 얼굴이지만 스스로도 왜 웃고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12년 동안 전학을 10번 다니면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그동안 또래관계에서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데 오늘 나랑 있을 때처럼 학교에서 지냈다면.... 네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몰라.


요즘 그는 많이 우울하고 힘들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비 고3이다. 대학도 가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한다는데,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는데, 다들 그에게 머리가 좋으니까 잘 해낼 거라고 하는데 정작 그는 자신이 없단다. 미래가 너무 걱정된단다.


그래봐야 내 추측이겠지만 그가 말한 것들을 모아 상상을 더해본다.


만약 내 행동과 표정이 부적절한 장소와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나온다면? 내 행동 하나하나가 매일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면? 친구, 가족, 선생님, 누구 단 한 명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이 와중에 고3이라고 대학을 가야 한다는데 하필이면(?) 아이큐검사는 지능이 높다는 결과가 나오고,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데 12년 학교 생활도 엄청 힘들고 외로웠는데 대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또 가야 한다면? 심지어 대학에 가서 뭘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근데 대학에서도 계속 내가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한다면? 취직한 직장에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내가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의 걱정과 질문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진다. 질문이 걱정이 되고, 걱정이 공포가 된다.


그를 위하여 부모가 결단해야 할 어떤 시점이 아닐까? 아니, 이미 지났나? 그의 부모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오늘은 그의 부모님과 대화하며 잔인한 말을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다. 한 마디라도 덜 할걸, 전화 말고 차라리 만나서 말할걸, 그 말은 하지 말걸... 여러 후회 속에 잠 못 들고 하소연을 쓴다.


어머님, 아이가 많이 힘들어해요. 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가도요, 오늘 저한테 보여준 모습을 하고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아이의 특수한 상황에 맞춰 적절한 교육이 필요해요.

이 상황에서 공부는 무리입니다. 중증우울 상태에서는 정보를 입력하고 처리하고 기억하는 일이 잘 안 돼요. 이런 실패가 매일 쌓이면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어요.


아. 글로 써도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아무리 글을 수정해도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어머님,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요. 그리고 저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결단을 좀 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젠장... 역량이 부족한 상담샘이라 그런가, 결국엔 부탁과 사과로 끝나네. 다 내 욕심일 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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