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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y 05. 2019

평행산책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시간

한쪽 방향으로 일정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걷는 행위.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게 하는 행동.


어느 날, 세나개에서 '평생산책' 이라는 산책 방식을 봤다. 두 강아지에게 서로의 존재를 안전하게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란다. 평행산책에 참여하는 두 강아지는 언제든 고개를 돌려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리는 적당히 멀어서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안전한 거리에 놓인 한 마리의 강아지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길을 걸어가도 되고, 가만히 있어도 괜찮다. 간식을 먹어도 되고 풀냄새를 맡아도 된다. 그동안 다른 강아지에게는 또 다른 선택권이 주어진다. 저 강아지를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지 않는 것. 따라 하는 것과 따라 하지 않는 것. 이렇게 자유도가 높은 상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강아지들은 곧 서로를 편안하게 여기게 된단다. 정확히는 상대방이 안전한 강아지라고 판단함으로 인해 내가 편안해진 것이겠지.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의 존재가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 [허그하우스 3호점]이라는 하나의 셰어하우스에서 만난 24명의 개체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지키되 서로의 주파수에 교감하는 시간.


각자 또는 서로


우리에게 서로는 주어졌다. 나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어진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잠깐 만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짧은 기간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같이 산다. 삶이라는 그 막중한 묵직함이 우리들 관계에 내려앉았다.


자신을 스스로의 언어로 충분히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어떤 말로 나를 소개해도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말을 위한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은 믿을 게 못 돼.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각자를 어떻게 소개해야 서로에게 안전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평행산책은 이런 내 고민에 해답지가 되어줬다.

한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것.
대신 각자의 곁에 서로 존재하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서로를 본다. 무엇을 공부를 하는지, 어떤 생산을 하는지 각자에겐 익숙하지만 서로에겐 생경한 습관과 일상을 발견한다. 함께 감각할 수 있는 돌발 상황도 반갑다.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갑자기 기어 나오는 담배 냄새에 모두 다르게 대응하는 우리가 조화롭다. 같은 냄새를 맡아도 서로 다른 표현을 꺼내놓는 우리가 자랑스럽다.


허그 3층에서도 평행산책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머리를 말리고 누군가는 밥을 먹는다.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청소를 한다. 이 모든 다양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조화를 이루는 우리공간은 서로의 인식에 BGM으로 흐른다.


인식은 수용의 과정이다. 넌 이런 사람이구나, 몇십 년 다르게 살아온 각자의 존재를 '나'라는 일개 개체에 구성해본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는 각자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까?  ‘나’라는 존재는 너에게 어떻게 인식될까? 나는 너에게 어떤 환경으로 존재하게 될까? 영화 아바타처럼 오늘도 나는 당신을 본다. I see U.


우리 이렇게 자주 곁에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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