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갑자기 분위기 지리산

by 보라체

그 어떤 산도 가보고 싶은 곳 없었다.

당연히 지리산도 가보고 싶은 적 없었다.

새벽 3시 반,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들과 길을 떠나고 있다.


산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오늘 갑자기 산 꼭대기에 올라가 일출을 보게 생겼다.

심지어 지리산 일출을.


태어나 한 번도 어둠 속 산행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칠흑 같이 어두운 산을 등산하게 됐다.

그게 하필 지리산이다.


4시에 화엄사주차장에서 만나 성산재까지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올라갔다. 성산재에서 노고단까지 걸어서 40~60분을 걸으면 되는 코스.


경사도 높지 않았고 길도 험하지 않았지만 등산초보인 나는 좀 힘들었다. 아무리 완만한 경사여도 계속 이어지니 몸이 쉬어갈 타이밍이 없더라. 전 날 잠을 겨우 3시간 밖에 자지 못했기 때문에 숨이 차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둠 속 산행을 밝혀주는 랜턴 빛이 너무 흔들려서 멀미까지 생기는 판이었다. 이 와중에 야맹증 때문에 밤에는 정말 너무 안 보여!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리 알았어도 올라갔을까. 역시 영광은 모를 때 질러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새벽하늘에 콕콕 박혀있는 별이 선명하게 휴대폰에 담긴다.
쉼터를 지나니 랜턴이 없어도 앞이 보였다. 안개가 없었다면 어떤 풍경이었을까?


같이 올라가는 친구들이 내 발 밑에 빛을 비춰주고, 가장 느린 내 속도에 맞춰서 걸어주었다. 괜찮냐고 물어봐주기도 하고, 재밌는 얘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숨이 차서 말을 못 하고 걷기만 했다. 주변 풍경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드디어 노고단에 도착했다. 먼저 와 계신 분들 몇 명을 제외하면 우리가 1등이라는 느낌이다. 물론 제외할 이유가 없고, 1등도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다. 왜냐면 먼저 와 계신 분들은 반대쪽에서 카메라 세팅을 하고 계신 프로분들이었거든. 풍경이고 나발이고 너무 힘들어서 당장 주저앉고 싶지만 바닥이 너무 축축해서 포기해 버렸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기 전에 인증샷을 찍기 시작한다.


반팔복장 때문에 많은 등반러들의 걱정을 샀지. 춥지 않냐며. 젊냐며. 껄껄껄.


친구들이 싸 온 커피를 마시고, 친구들이 싸 온 바나나와 초코바를 먹으며 충전을 했더니 시야를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힌다. 그저 몇 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카메라를 가져온 분들은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니 해가 뜬다. 해는 우리보다 낮은 곳에서 떠올라 점점 위로 올라갔다. 사람 얼굴보다 더 큰 태양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우리와 자연이 함께 연출한 경이로움에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온다.


저기가 천왕봉이었나? 의식이 흐릴 때 설명을 들었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친구의 얼굴보다 훨씬 더 큰 태양.

다 놀고 나니 조금 춥다. 친구가 벗어준 외투에 의지해 체온을 올려본다. 휴대폰만 달랑 들고 올 수밖에 없었던 초보 등반러를 이해하고 도와준 친구들이 너무 고맙다. 내 바지는 사실 여름셋업 투피쓰 정장이다. 후후후. 청바지를 입고 오는 것도 무리이고, 원피스도 무리이고, 등산복은 없어서 이렇게 됐다. 차라리 레깅스를 입을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는 늦어도 너무 늦었지.



우리의 등반은 지리산 야생초 전문가분들과 함께 했다. 전문가분들은 노고단에 핀 야생초를 정말 사랑하는 분들이셨다. 꽃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열정을 보았다. 높은 산 꼭대기에 핀 꽃은 그 색이 더 청명하다고 말씀하시며 반짝거리는 눈빛이 곧고 순수하다. 나도 저런 어른이 되면 좋겠구나, 막연히 생각했다.


지리산 꽃은 산 아래 꽃보다 훨씬 짧게 핀다고 한다. 산이 춥기 때문에 9월 지나면 월동준비를 시작한다고. 이 얘기를 듣는데 뭔가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으로 태어났지만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기름진 환경에서. 이내 서로의 환경을 비교하고 저울질한다. 누구 인생이 더 행복하고 불행한지 따져보는 것이다. 아마 인간이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의미 없는 비교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애초에 인간의 눈은 남의 인생을 보게 만들어졌지, 내 인생을 볼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속 내 눈에는 남의 인생이 보인다. 남의 인생을 보고 내 인생을 생각한다.


내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타인의 인생이 참 못마땅해진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깎아내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지.


너도 그 위에 있지 말고
내가 있는 이 아래로 내려와.
우리는 다 별로잖아.
나랑 같이 여기서 썩자.
나 혼자 여기서 썩게
내버려 두지 마. 나 억울해.


지리산 야생초는 그러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환경에 맞춰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내가 지리산에서 태어났구나.
지리산은 춥네.
꽃을 좀 빨리 닫고
겨울 준비를 잘해보자.


이런 야생초의 모습이 어쩐지 듬직하다. 환경에 맞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런 인생을 사는 게 마땅하겠지.


그렇다고 누구나 척박한 환경에 안주해야 한다, 꿈꾸지 말아라 이런 얘기는 아니다. 남의 인생과 내 인생을 비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중이다. 그럴 시간에 내 것을 다듬고 보살펴야지, 산 위의 야생초처럼 멋들어지게 피어나야지.


이런 게 야생초의 매력인가? 꽃 피는 기간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등산날짜를 골랐는데 운이 좋았다.


야생초 전문가분들은 우리에게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오늘 지리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풍경은 당신들께서 본 지금까지 봐왔던 지리산 풍경 중 손에 꼽을 만큼 예쁘고 변화무쌍했다고. 등반 한 번만에 이렇게 다양한 지리산을 느낄 수 있다니, 축하한다고. 그리고 다음에는 또 다른 지리산 경치를 준비할 테니 또 같이 오자고.


오를 땐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하산하는 내내 반대쪽에서 등산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곤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일출 보셨나요?" 그럼 우리는 당당하게 웃으면서 "네"라고 답했다. 이럴 때 조금 뿌듯하더라?


우리나라 산 중에서 지리산이 가장 면적이 넓단다. 한라산보다 3배 크다고. 거대한 산에는 토끼도 살고, 고라니도 살고, 뱀, 반달곰도 산단다. 산의 매력은 무엇일까. 여전히 잘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지리산에 와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요즘 지리산 한쪽을 깎아 골프장을 만들고 있단다. 지역 경제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일자리창출, 관광개발로 인한 관광인구와 유입인구 확대, 상권확대... 이렇게 멋진 지리산을 벌써 깎아냈다고 하니 통탄할 수밖에 없더라.


왜 우리는 서울 중심의 경제가 됐을까. 여기저기로 인구도 퍼지고, 수도권 아닌 지역에서도 다양한 일자리가 있었다면 지리산을 깎는 일까지 필요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누가 인간에게 지리산을 깎아낼 권리를 손에 쥐어줬을까.


이렇게 생각해도 지역주민분들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나도 결국 수도권 인구 중 한 명이니까. 이번 골프장 개발이 지리산 개발의 마지막 타임라인이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다른 개발이슈가 떠오르고 있다고 친구가 알려준다.


산의 매력을 잘 모르는 나도 산을 지켜야 한다는 건 잘 알겠던데,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의견을 내면 안 될 것 같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야 할 것 같은 지리산 개발 이슈 앞에서 내 존재가 참 무력하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다. 이런 소감조차도 지리산과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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