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인생이 퍼즐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퍼즐 20판 후기

by 보라체

퍼즐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한 달에 2~3판은 맞춘다. 제목에는 퍼즐 스무 판을 맞췄다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이 맞췄다. 좋아하는 퍼즐은 같은 퍼즐이어도 열 번 넘게 맞추기도 하고, 최근 3년 내 맞춘 게 아니라면 사진도 없기 때문이다. 퍼즐을 맞추는 순서는 늘 비슷하다.

1. 테두리, 코너 4개, 색깔별로 퍼즐 분류해 두기
2. 테두리 먼저 맞추기
3. 특이한 퍼즐 먼저 맞추기 : 원형, 얼굴 등
4. 면적이 작은 색깔부터 맞추기
5. 마지막으로 가장 면적이 큰 색깔 부분 맞추기


주로 당근에서 퍼즐을 데려온다. 어떻게 하냐면, 한 분기 정도마다 500 퍼즐, 1000 퍼즐 등으로 검색해서 집 근처에 있는 퍼즐을 싹 사 오는 방식이다. 맞추기 싫은 건 이때 내놓기도 한다. 팔린 적도 있다!


당근에서 구하기 가장 편리한 건 500피스 퍼즐이다. 제일 물량이 많이 풀린다. 맞추는 내 입장에서도 퍼즐을 맞추자고 결심했을 때 3~4시간이면 한 판을 뚝딱 맞출 수 있는 500 퍼즐이 딱 좋다. 그중에서도 가로형 퍼즐이 가장 좋다. 내가 보는 시점 방향과 퍼즐 방향이 일치하니까 회전시켜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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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건 테두리 분류할 때 사람 부분, 붉은 테두리, 제일 큰 가로등, 초록잎, 푸른 하늘을 따로 분류해서 맞춘다. 초록잎이나 푸른 하늘을 맞출 때 기분이 좋고, 아득히 먼 곳까지 건물이 펼쳐져 있어서 멀리 내려다보는 탁 트인 느낌이 든다. 청량해. 당근에서 7천 원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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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체가 그로테스크하지만 그림을 보고 맞추는 재미가 있는 퍼즐이다. 그림 내 책장마다 테두리가 있어서 따로 분류를 해두기 좋고, 책장의 각 칸마다 다른 색의 책이 꽂혀 있어서 재밌다. 한 칸이 한 세상 같은 느낌이랄까. 책 사이마다 작은 장치나 캐릭터가 있는데 책에 비해 전혀 다른 스케일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펼쳐지는 느낌이다. 숨은 그림 찾기 마냥 퍼즐 한 조각 맞출 때마다 "허허, 이 녀석이 여기 있었구만?"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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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초록한 퍼즐을 맞추고 있자면 나조차도 초록색이 되는 기분이 든다. 물이 흐르기는 하는 건지 의심하게 되는 조용한 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커다란 나무 사이를 지나는 느낌은 어떨까?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세로모양 퍼즐은 눕혀놓고 맞춰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지양하고 싶지만 그래도 그림이 괜찮으면 데려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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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왠쪽은 다이소 퍼즐이라는 얘기를 들어봤는데 정확히는 모른다. 가운데는 물랑루즈, 오른쪽은 마블


그림을 보고 맞추는 것보다 그림을 볼 필요 없이 맞출 수 있는 퍼즐을 더 좋아한다. 그건 바로 그라데이션 퍼즐! 별다른 그림 없이 색이나 재질의 작은 변화만 추적하며 맞출 수 있어서 꿀잼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진 유일한 그라데이션 퍼즐은 딱 두 개인데, 둘 다 우유니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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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퍼즐은 열 번도 더 맞췄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색이 가득 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핑크색도 핫핑크, 인디언핑크, 파스텔핑크 등 다양하게 들어있고 보라색도 핑크색에 가까운 보라색, 진한 보라색, 푸른 끼가 도는 보라색까지 다양하게 있다. 우유니 소금사막과 은하수의 조합이라니! 경이롭다. 너무 많이 헤쳐 모여를 반복했더니 퍼즐 한 조각의 귀퉁이가 손상됐다. 이 퍼즐만큼 예쁜 퍼즐을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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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가득한 유니소금사막 퍼즐은 들여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세 번이나 맞췄다. 온라인사이트를 통해서 데려왔는데 맞추고 보니 두 피스가 없었다! 한 피스는 소파 속으로 굴러 들어가서 잃어버렸다지만 그건 딱 한 피스였다. 퍼즐이 한 조각 없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건, 짜증이 나기보다는 별 걸 다 경험해 본다는 생각에 오히려 재밌더라는 것이다. 드디어 나한테도 퍼즐회사와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생겼네? 누군가 나한테 이 퍼즐을 맞추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꼭 이 퍼즐을 다 맞춰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퍼즐을 언제까지 맞춰야 하는 데드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냥 마음이 편하더라. 이런 게 바로 '취미'라는 건가? 이메일로 퍼즐조각신청서를 보내고 일주일 뒤에 일반우편으로 퍼즐 2조각을 받았다. 내 잘못으로 분실한 퍼즐까지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1000피스 각. 가끔은 정말 그런 느낌이 온다. 오늘은 1000피스를 시작하기 딱 좋은 날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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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퍼즐은 세 번 정도 맞췄는데 맞출 때마다 속도가 빨라져서 재밌다. 그림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될수록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된다. 이 퍼즐은 맞출 때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명화퍼즐을 좋아한다. 명화를 따라 그릴만한 재능이 나한테는 없지만 낱낱이 흩어진 한 조각의 명화를 들고 매의 눈으로 제자리를 찾으려 노력하다 보면 왜 여기에 이걸 그려 넣었는지, 왜 이 구도를 선택했을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까지 자꾸만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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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서는 애니메이션을 잘 보지 않게 됐지만 퍼즐을 갖게 되면 관련 애니도 보는 편이다. 난 이 퍼즐의 그림이 예뻐서 골랐지만 막상 고르고 나니 이 장면이 애니에서 어떤 장면인지 알고 싶었다. 둘이 만나는 건지, 헤어지는 건지, 둘은 어떤 관계인지, 여긴 어디인지 같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애니를 찾아보고 나서 퍼즐을 맞췄다. 이런 주말도 소소하고 재밌다.


1000피스 퍼즐은 원룸에선 도전이었다. 일을 다니니까 자투리 시간에 1000피스 퍼즐 한 판을 맞추려면 일주일 넘게 필요했는데, 막상 일주일 넘게 책상을 비워놓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책상이 필요 없는 일주일을 미리 가늠해 보고 판을 펼쳐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책상이 필요해지면 퍼즐 위에 노트북이나 책을 펼쳐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1000피스 퍼즐은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돌려가면서 맞춰야 하는데 원룸에서는 퍼즐을 돌리기가 불가능하다는 어려움도 있었다. 내 손이 닿아서 먼저 맞추게 된 부분의 퍼즐을 A4용지만 한 사이즈로 따로 떼어놓고 손이 닿지 않던 부분을 내 앞으로 당겨와야 퍼즐 한 판을 다 맞출 수 있었다.


방3화2의 널찍한 아파트로 이사 온 뒤에는 주방의 식탁을 거실에 갖다 두고 퍼즐을 맞춘다. 테이블의 4면 어디든 의자를 두면 앉아서 퍼즐을 맞출 수 있다. 작업실 책상 위에서 맞추기도 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니, 선택권이 있어서 기쁘다. 취미생활은 역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지금도 원룸에서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이 생각난다. 나처럼 공간이 부족해서 뭔가를 시도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진 않을까?


원룸에 살 때는 보유하고 있는 퍼즐의 개수를 항상 유지해야 했다. 보관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퍼즐은 취미용품이니까 공간을 많이 할당해 줄 수 없었다. 새로운 퍼즐을 들여오려면 갖고 있던 퍼즐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개수를 유지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 거실 수납장 한 섹션을 퍼즐과 보드게임으로만 채워버렸다. 수납장 문을 열 때마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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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퍼즐 중 최악의 퍼즐은 800피스짜리 곰돌이 푸이다. 딱 한 번 맞췄는데 맞추는 동안 너무 괴로웠다. 다 푸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다. 표정이 다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이 표정이 반복되는 퍼즐이더라. 맞추면서 계속 욕이 튀어나왔다. 원래 푸 좋아했는데... 후하... 한 번 딱 맞추고선 바로 당근에 내놨는데 아무도 안 사간다. 징글징글한 푸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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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잃어버리고 없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랜덤퍼즐이다. 대여섯 번은 맞춘 것 같다. 아래 반고흐의 복숭아나무 퍼즐이 505피스였나, 508피스였나 피스 개수도 독특했다. 퍼즐 모양이 다 다르게 생겨서 맞추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이 그림은 노란색과 하늘색을 제외하면 딱히 튀는 색이 없어서 난이도가 조금 있었는데 그래도 맞추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만 일반적인 직소퍼즐이 갖고 있는 꽉 끼는 느낌이 있는데, 랜덤퍼즐은 그런 느낌 없이 좀 헐렁하게 맞아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각 곡선의 각도가 완만해서 그렇겠지만 손맛이 좀 아쉽긴 하다. 랜덤퍼즐인데 꽉 끼는, 꼭 맞아 떠어지는 그런 퍼즐이 있으면 꼭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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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부족할 때, 정말 잠깐만 손을 풀고 싶을 때는 150이나 300피스 퍼즐을 맞춘다. 휘리리릭 한 판 맞추고 나면 뭔가 기분이 말끔해진다. 끝난 느낌이랄까. 오늘 하루에 뭐라도 하나 '완성'했다는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내가 쳐내는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 뭐라도 하나 쌓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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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을 맞추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몰입할 수 있어서 편안하다. 주로 화면을 볼 필요 없이 귀만 열어놓아도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퍼즐을 맞춘다. 요즘은 뉴스를 틀어 놓고 맞추는 것도 괜찮더라. 컬투쇼 레전드 사연 같은 걸 틀어 놓고 깔깔 웃으면서 맞춰도 기분이 좋다. 맞추는 자세가 그리 감성 있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냥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해서 찍어봤다.


원룸 살 때부터 갖고 있던 접이식 테이블을 퍼즐판으로 쓰고 있다.


예전에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퍼즐, 보석십자수, 컬러링 같은 걸 도전하지 못했다. 이런 걸 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이럴 시간에 논문을 보든지, 뭘 하든지 정말 뭐라도 하나 더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공부를 못 하거나, 돈을 못 벌면 안 되는 존재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새겨진 메시지는 공부가 아니면 다 쓸모없다는 거였다. 살아볼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배워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요즘 하는 글쓰기, 영상 만들기, 삶 만들기 같은 게 너무 어려워서 퍼즐 속으로 도피하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퍼즐은 명확하다. 박스 하나를 열어서 쏟아내면 이 퍼즐로는 무조건 한 판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퍼즐은 맞추다 막혀도 불안하지가 않다. 어차피 이 안에 모든 퍼즐조각이 모여 있을 테니까, 나는 너희들의 제자리만 찾아주면 되니까. 마치 객관식 문제풀이 같은 것이다.


반면에 실제 삶은 주관식 같다. 아니지, 면접이지. 아닌가, 숙박면접인가. 시험 범위도 없고, 정답도 없다. 뭔가에 세네 시간 공을 들여봤자 결과가 어떻게 나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제발 보장되어 있다면 좋겠다. 그게 실패라고 해도 말이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채 뭔가에 시간을 들인다는 게 나한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다. 누구에게든 그렇겠지. 이 복잡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균형을 잡고 내 몫을 해낼 수 있는 걸까. 자꾸만 길을 잃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럴 때마다 퍼즐을 붙잡는 걸지도 몰라. 여기는 확실하게 편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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