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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Nov 13. 2023

민속촌 공연, 아이 교육에 좋지 않아

가을을 맞이하여 용인에 있는 민속촌에 다녀왔다. 민속촌은 나와 애인이 정말 좋아하는 공간이다. 드넓고 푸르르고 자연스러운 곳. 가을 낙엽과 초겨울 차가운 공기마저 하나의 정취가 되어 어우러진다. 풍성한 음악공연은 당연히 챙겨 감상해야 하는 필수코스다. 완향루에서의 대금 연주나 공연장에서 풍물한가락은 놓치면 안 된다. 부채춤까지 보면 그야말로 호강이다.


민속촌에 자주 오가다 보니 기본적인 마을 지리와 가옥, 재현해 놓은 옛 생활상들은 눈에 익어 버렸고 결국 우리가 즐길 것은 시즌별로 새롭게 펼쳐지는 이벤트가 되었다. 올 가을 행사는 "2023 가을축제 붉게 물든 낭만조선"이라는 이름이다. "낭만을 찾아서", "첩자색출", "정면승부" 등 재밌어 보이는 공연이 많았다. 체험도 신분패, 낭만파 증표, 낭만검, 감성봉, 감성야명등을 제작하는 등 낭만검객을 떠올리는 재미가 가득한 기획이다.



다만 공연을 보면서는 좀 답답함을 느끼게 됐다. 민속촌에 가봤다면 알겠지만 공연의 주 타겟층은 아이들이다. 어제 나는 "낭만을 찾아서"와 "첩자색출" 두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공연에서 너무 불편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외모평가, 외모비하가 주제인 줄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면 다냐?
야, 그만 먹어! 또 먹냐?
(여성배우) 조선 최대 섹시 자객(우~ 소리를 내며 섹시하고 유쾌한 포즈)
어찌 그리 잘생겼는지.
키도 작은 게.
눈코입이 자유분방하다.
아줌마 같은 게 무슨 검객이야?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상품을) 줘야 할지 모르겠네.


낭만비책 관련된 극의 주요 흐름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 외모평가와 외모비하로 구성됐다.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벌어진 배우 개인의 애드리브인지, 실제 대본에 있는 대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보는 내내 이 공연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외모평가나 외모비하가 "폭력"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운다. 그래서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걸로는 별로 재밌어하지도 않는다. 초등학교에 나가서 교육을 하면 "키가 작다", "뚱뚱하다" 같은 얘기로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이제 이런 외모비하가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는 것, 심지어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아이들은 다 안다. 그러니 아이들은 외모를 갖고 놀리더라도 별로 웃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이 재밌어하지 않으니까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계속 공연해도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 현장에서 가장 문제적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이들과 함께 온 어른들이었다. 배우들이 외모비하와 성차별로 개그를 시도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이 깔깔거리고 웃기 때문이다. 깔깔깔깔. 어른들의 웃음소리는 아이들에게 외모평가와 외모비하가 '재밌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양육자를 보면서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아, 이런 게 웃긴 거구나."


성차별도 마찬가지이다. 아저씨, 아줌마 같은 얘기가 왜 웃기는지 아이들은 전혀 모른다. 여성검객에게 "아줌마 같은 게 무슨 검객이야"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거기에 어른들이 웃으면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린다. '아줌마는 검객이 될 수 없구나.' 본디 아줌마라는 건 여성들이 나이 들며 꼭 거쳐가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성들은 검객이 될 수 없다는 건가? 여성의 가능성을 제한했던 수많은 교육적 실패사례가 이미 "실패사례"로 이름표를 받아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여성소방관, 여성정치인, 여성대통령... 여성이 가지 못할 길은 없다고 교육한다. (하필 이번 민속촌 콘텐츠가 검객이라 말이 좀 웃기긴 하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검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민속촌의 교육적 콘텐츠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뚱뚱한 사람도, 눈코입이 자유분방한 사람도, 아줌마도, 키가 작은 사람도 훌륭한 검객이 될 수 있다.


성별역할 고정관념을 재현하기도 했다. 여성 검객은 꼭 날씬해야 하는가? 여성은 꼭 섹시해야 하는가? 대체 왜 그 여성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섹시포즈를 하게 된 걸까? 섹시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장난감 총으로 관객을 겨냥하는 것은 어떤가? 한 배우가 아이들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장난감 총을 가슴팍에서 꺼내어 관객에게 겨눴다. 물론 재밌다. 그 배우의 뛰어난 재치에 감탄했다. 하지만 불편했다. 이런 웃음코드가 이렇게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공연되어도 되는 것인가?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매일 전쟁 소식을 다룬다. 그 자리에는 외국인도 많았는데 그 외국인 중 우리나라보다 전쟁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총기에서 안전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도 저 배우가 우리에게 겨눈 총구가 이렇게나 무서운데. 미국이나 태국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는 어떻고? 어른이 아이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아이가 아이에게 총구를 겨눴던 수많은 사고들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어른인 배우가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며 웃을 수 있을까? 너무 놀라고 두려웠다. 아무도 그 배우에게 공연에서의 주의사항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일까?


몇 년 전에 개그프로그램들이 막을 내릴 때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때 외모비하와 성차별도 문제가 됐다. 폭력적인 장면을 재현하는 것도 문제가 됐다. 민속촌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을 기획하면서 공연기획자와 배우들에게 어떤 교육을 진행했을까? 아이들이 성차별과 외모평가, 차별을 배우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민속촌이라는 곳이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간도 아니고 공기업도 아니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공연을 해도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옛 우리 민족에게 성차별과 외모비하문화가 있었으니 그 또한 계승해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려나?


좋은 것을 승계하고 나쁜 것은 지양하는 게 조상님들이 일궈온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불편하면 민속촌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어쩌면 나는 당분간 민속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민속촌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과 자극을 주는 장소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곳이라면 가지 않는 게 맞겠지. 


부디 아이들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문화공연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게 민속촌 공연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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