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과 섹스, 섬세한 끌림

킬링 이브 @WATCHA

by 보라체

넷플릭스가 아니다, 왓챠다!

생리 때마다 기분과 몸이 다운된다. 그런 날엔 침대에 파묻혀 드라마를 몰아본다. 시즌1, 2 합쳐서 40분 분량의 영상 16번이 하룻밤만에 끝나는 마법. 이번 달엔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 되시겠다.


왼쪽부터 산드라 오, 조디 코머


왼쪽의 흑발 여성은 MI6에서 일하는 이브 폴라스트리. 살인마가 여성이라고 추측되는 사건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수집하고 분석한다. 오른쪽의 금발 여성은 여성 살인마 빌라넬. 이름 모르는 조직에 속해 일한다. 누가 살인을 사주했는지 모른 채 사람을 죽이고 돈을 받는다. 둘의 거리와 관계가 계속 변화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줄거리.


미국의 효율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유럽의 느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난 유럽파. 킬링 이브에서는 유럽의 아름다움을 그냥 마구 마구 뿌린다. 이슬비, 가랑비 마냥 흩뿌려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장마 때 쏟아지는 폭우 같은 아름다움이 땅바닥에 내려 꽂힌다. 덕분에 행복하더라고요? 여러분도 보는 내내 행복하세요.


1.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장르물

(X) government of 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 drama of the woman, by the woman, for the woman


총 쏘고 사람 죽이는 것은 남자만 하는 줄 알았다. 지금껏 내가 본 책과 드라마, 영화에서 여성 스파이나 여성 살인마가 나올 때는 몸에 딱 달라붙는 야한 옷을 입고 가슴골을 보여주며 성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꼬셨다. 빌라넬은 달랐다. 16개의 에피소드에서 다양한 여성으로 변장한다. 그중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돈을 받는 성판 매자도 있지만 성공을 열망하는 사회초년생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밤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호텔에서 청소하는 이주민 여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유롭게 '남성'의 공간과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을 마구 죽인다.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인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빌라넬은 꽤 많이 다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얌전히 있지 않는다.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외딴곳을 홀로 걷는다. 모르는 남성의 집에 갇혀서 탈출을 꾀하기도 한다. 자신을 쫒는 이브에게 오히려 SOS를 치기도 한다. 능력을 인지하되 과신하지 않는다. 직업이 살인인지라 직업에 최선을 다한다. 처절하고 치열한 노력이다. 아름다움과 완벽을 기하는 장인정신에 박수가 절로 나오더라. 여성도 이렇게 입체적인 살인마가 될 수 있는 거였어! (포인트가 이상하네.)


2. 다름

균형 잡힌 다양성


킬러영화에 1도 관심이 없는 나를 집중시킨 것은 이 드라마의 균형 잡힌 다양성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플랫폼과 콘텐츠에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겠다며 신박한 조합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늘 어딘가 아쉽고 못마땅한 지점이 남았지. 내게 킬링 이브는 그런 쪽에서 특별하다. 정교하고 풍성해.


이름 : 이브 폴라스트리 vs 빌라넬

직업 : 사람을 죽이는 킬러 vs 그 킬러를 쫒는 요원

헤어 : 흑발 vs 금발

인종 : 아시안 vs 백인

나이 : 40대 vs 20대

체형 : 마른 체형 vs 마르지 않은 체형

결혼 : 미혼 vs 비혼

성 정체성 : 이성애자 vs 양성애자

음, 차별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름을 인정하되 평등을 지향하는 것은 늘 어렵다. 아시안, 백인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되는 걸까? 그럼에도 둘은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정의하지 않아도 괜찮을지 몰라.


성 정체성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이렇게 적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남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을 여성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 이브 폴라스트리가 결혼했다는 이유로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빌라넬이 여성과도, 남성과도 섹스한다는 사실이 양성애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는 수십, 어쩌면 수억 개의 성 정체성 스펙트럼이 있다. 모두 다르고 특별하며 변화무쌍하다. 이 드라마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3. 비판

효율을 위해 관계와 감정을 치부하는 사회, 여혐에 대한 비판, 가부장제 미러링


자신을 꾸미는 여성은 무능한가?

살인마로, 요원으로 일하는 이 여성들은 성과를 쫒되 피부는 촉촉하게 보습한다. 자신을 꾸미거나 관리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은 젊음과 외모에 의존하는 무능한 여성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곤 한다. 킬링 이브에서 여성들은 함께 일하되 서로의 멋짐과 피부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 중에 상사에게 보습제는 어떤 걸 사용하는지 묻고, 그 상사는 정직하고 담백하게 답하더라. 이 대화는 중요한 내용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비하되어야 할 주제로 치부되지도 않는다. 킬링 이브에서는 회의에 참여한 다른 이들도 보습제 관련 대화를 비웃지 않더라.


성과와 효율을 앞세운 사회

살인마와 요원인 이 여성들은 열심히 일한다. 열심히 살인하고, 열심히 살인마를 쫒는다. 물론 실패도 있다. 하지만 실패 앞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일은 없다.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상사는 소리를 지른다던지 물건을 집어던지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가진 권력을 폭력으로 휘두르지 않는다. 부하직원 또한 상사의 감정과 의견을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업무에 반영한다.


아직도 지구에서 여성들의 대화는 감정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만약 다음 세대에 [감정]이라는 것이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벗어나 공적인 영역에 자리를 잡는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풍성하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겠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선한 것 vs 악한 것?

이브는 가정보다 일을 중시한다. 남성인 남편에게 자신의 일과 방향에 대해 별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이브를 향해 '악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가부장제에 대한 미러링이라고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가부장제에서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킬링 이브에선 반대일 뿐이다. 남편은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이브는 답하지 않는다.


네가 알아서 뭐해?
날 방해하거나 네가 위험해지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지켜줄게. 물어보지 마.


빌라넬은 자유롭다. 순수하고 섬세하게 생긴 이 매력 넘치는 몹쓸 살인마는 가차 없다. 살인은 빌라넬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욕망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 앞에 빌라넬은 정직하다. 쇼핑을 좋아하고, 섹스할 사람을 직접 선택한다. 법이나 도덕이라는 체계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보여준다. 어르신들의 표현에 따르면 아마도 빌라넬은 자유부인!


4. 관계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널 존중해버리겠어!


서로의 선택에 대한 존중

이 일하는 여성들은 서로의 일을 존중한다. 그것이 살인일지언정. 그것이 나를 잡아 가두려는 요원일지언정. 누군가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 비친 이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는 원래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잖아.'라고 생각하며 넌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지금 이런 것인지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살인마의 목소리가 킬링 이브에 있다. 이 일을 그만하고 싶을 뿐이라던 빌라이의 말은 정말이라고 생각해.


이브는 빌라넬이라는 살인마가 집에 찾아왔을 때에도 침착하게 사람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 안됐지만.


관계의 확장성과 주체성

같은 팀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묻어가지 않는다. 철저하게 서로를 의심하고 치밀하게 예상하며 계획한다. 요원 이브는 상사의 아들과 한 팀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이브는 '넌 상사 아들이니까'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모-자식 관계라고 해도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상사인 엄마도 마찬가지다. 이브에게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부탁하지도 않고, 아들에게 넌 내 아들이니까 내 편을 들라는 결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아들에게 자리를 피해달라면서 "잠깐 드라마 좀 녹화해줄래?"같은 말을 사용하긴 하지만.


기성세대 - 새로운 세대 간의 작용

살인마라는 직업도, 요원이라는 직업도 오롯이 그녀들만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요지경 세상에서 청년들의 직업은 100% 자신의 욕망과 신념에 의한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킬링 이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인마를 쫒는 요원이든 빌라넬은 조직으로부터, 이브는 M16 조직으로부터 미션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구조에서 빌라넬과 이브의 욕망이 조직의 이해관계에 적합할 때에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들이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깃도, 방법도, 장소도, 기간도 모두 상사의 지휘감독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마치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조정하고 있음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왜 기. 성. 세. 대. 인지 알 수 있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각자의 욕망과 신념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판을 깔아 둔 것은 기성세대이다. 중간에 빌라넬이 "우리가 사실은 같은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하기도 하더라. 그것 참 의미심장하네.


5. 끌림

로맨틱 끌림, 섹슈얼 끌림, 또 다른 끌림


끌림에는 다양한 차원(Dimenstion)이 존재한다. 성적 끌림만 끌림이 아니다. 나도 잘 규정하기 힘든 이 다양한 끌림은 모두에게 분명히 존재한다. 그냥 같이 있고 싶기도 하고, 문득 생각나는 사람도 있다. 만지고 싶은 사람도 있고 소유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내가 들어본 끌림은 로맨틱 끌림, 섹슈얼 끌림, 플라토닉 끌림, 센슈얼 끌림, 에스테틱 끌림 이 정도이다.

너와 사귀고 싶어.
너랑 자고 싶어.
너와 친구 하고 싶어.
널 계속 바라보고 싶어.


빌라넬과 이브는 서로에게 끌린다. 그 끌림의 차원은 계속 변화한다. 살인마가 여성인 사건에 끌리는 이브. 자신을 쫒는 요원에게 끌리는 빌라넬. 둘의 끌림은 어떤 차원일까?


이브는 빌라넬에게 끌리는 동안 남편과의 섹스를 거절한다. 딱 한번 섹스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빌라넬 덕분. 나중에 이브는 빌라넬 때문에 직장 부하와 섹스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빌라넬이랑은 안 하더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도대체 모르겠어.


하려고 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거.


6. 결말

- 여기서부터 결말 스포 있어요 -


빌라넬은 지루한 일상에서 '다름'을 찾는 살인마였다. 자신이 찾던 그 '다름'이 이브일 거라고 기대했다. 이브가 마침내 살인하게 됐을 때 이브는 괴로워하고 빌라넬은 기뻐한다. 사람을 죽인 이브가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둘은 달랐다. 빌라넬의 살인 동기는 유희였지만 이브의 살인 동기는 빌라넬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빌라넬은 살인하며 기쁘지 않았다. 둘은 달랐다. 이브에겐 돌아갈 가족이 있었고, 빌라넬에겐 만들어야 할 가족이 있었다. 다름을 확인한 빌라넬은 이브를 쏴버렸는데, 어이없게도 난 빌라넬이 너무 불쌍했다. 정말 황당하게도 그랬다. 너무 처절하더라. 너무 외롭고 고된 인생이더라.


살인마로 그려진 빌라넬에겐 사실 아픈 과거가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아픈 과거가 있는 법인데 살인마가 된 빌라넬이 악녀라는 결론? 그렇지도 않다. 모두의 인생과 관계, 감정이 소중하다는 결론인가? 규정하기 싫다. 시즌 3은 2020년도에 나올 예정이니 여러분 지금 달리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