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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r 11. 2019

성범죄자 구별하기, 가능?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다고?
그 사람이라고? 우리가 아는 그 사람?
평소에 얼마나 착하고 순한 사람인데~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믿기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믿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나도 그랬어.


성폭력은 피해를 예방할 수 없다.

성폭력으로부터 나를, 내 가족을, 내 친구를 지켜낼 수 없다. 가해를 예방해야 한다. 네가 혹은 네 가족이, 혹은 네 친구가 타인을 가해하지 못하게 해라.


성폭력에는 예방책도 없고 보상책도 없다.

취약한 현실이지만 그나마도 말해야 달라진다고 믿는다. 어쩌면 유일한 방법. 그 사람이 맞다. 그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이 지금 죽어 마땅한 악마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은 죄를 지었고, 피해자에게 싹싹 빌거나 법의 처벌을 받는 등 나름의 책임을 다하고 난 후 우리가 사는 일상으로 복귀할 사람이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매도하거나 씹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가 나쁘지 사람이 나쁘냐는 말을 몇 번씩 곱씹어야 하는 날들이 자주 있다. 우리 옆에서 웃던 그 사람이 가끔 생각난다. 저 자리에 있지 않는다면 내 옆에 있었을 그 사람.


세상이 못됐다.

자꾸만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 진다. 가해자들이 수천만 원 들여 수임하는 변호사가 싫다. 피해 입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판사도 싫다. 공부 잘해서 뭐 하나 싶다. 성폭력이 뭔지 가르치지 않는 교육도 싫다. 그런 사회도 직장도 가정도 다 싫다.


그럼에도 서야 하는 곳은 여기다.

피해와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입장을 결정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단죄해야 한다.


우리가 더 안전하게 존재하려면.
더 평화롭게 갈등하려면.    


피해사실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하는 ‘개념’이라는 말이 뼈에 사무친다. 내일도 피해사실을 획득하러 간다. 사회약자가 피해사실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들어주는 사회가 되면 투쟁이 사라질까?


‘너’를 위해 여기 있을게.
‘너’는 너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다.


#Me_too

#With_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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