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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r 11. 2019

저는 목격자입니다.

3.8 여성의 날 기념, 안산 여성대회 이어 말하기 발언대

3.8 여성의 날 기념, 안산여성대회 이어 말하기 발언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왔습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식상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성폭력은 계속되고 단죄는 요원합니다. 2019년 3월 6일 안산시 중앙동 광장


2017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직도 피해자에겐 진행 중인 사건이니까요. 아직도 피해자는 가해자와 닮은 그림자를 보면 깜짝 놀랍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저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안정한 노동현실에 분노했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던 청년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가해자의 얼굴을 겹쳐서 보게 됩니다.


어디에나 성폭력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목격자입니다. 사건 당시 상황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피해자의 상처가 곪아 가는 것은 또렷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에겐 기댈 곳이 필요합니다. 제가 그런 곳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책위가 꾸려졌고 재판에 함께 갔습니다. 재판은 작년 2월부터 10월까지 매달 한 번 씩 열렸습니다. 성폭력 재판은 가해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데 제가 본 재판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발가 벗겨진 채로 전쟁터에 던져졌습니다. 총도, 방패도 없었습니다. 그 전쟁터에는 가해자가 수천만 원 들여 고용한 변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터에서 발언권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은 판사, 검사, 변호사, 가해자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재판의 방향은 피해자를 향했습니다. 사건 당시에 피해자가 어떻게 저항했는지, 가해자를 유혹하진 않았는지, 기억이 나는지, 혹은 나지 않는지, 쉬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피해자는 재판장에서도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피해자의 신상을 보호하려는 조치는 있었지만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는 없었습니다. 재판장에는 피해자의 자리가 없습니다. 제 옆자리 방청석에 앉아서 마치 다른 사람 재판을 방청하듯이 자신의 재판을 참관했습니다. 그렇게 재판에 참석하는 피해자를 가리켜 재판부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성폭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똑똑해 보일 때 꽃뱀이 아니냐고 의심했고, 똑똑해 보이지 않을 때는 피해자의 말에 일관성이 없어 신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과와 피해배상을 요구한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몰아붙였으며, 피해자가 SNS에 고통을 호소한 글 마저 성폭력이 아니라는 근거로 사용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진술했습니다. 둘의 대화는 가해자를 유혹했다는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가해자의 카톡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성폭력 사건에서 증거는 늘 부족합니다.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피해자의 말을 제대로 들어야 할 의무는 누구에게 있나요?


안희정 재판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요.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됐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판결문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성인지적 판결이라니, 감개가 무량하더라고요. 일면식도 없지만 지금까지 고생하신 김지은 씨와 대책위 분들도 많이 생각나고요. 한편으로는 많이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재판은 이미 끝났거든요. 안희정 재판 1심과 항소심 사이에 저희들은 재판에서 졌습니다. 세상이 딱 한 발자국 앞으로 가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한 걸까요.


성폭력 사건의 끝은 어디인가요?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나요?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면 끝날까요? 사건 당시에도, 법원에서도 받지 못했던 사과를 이제 와서 받을 수 있을까요? 피해자가 그동안 받은 피해는 누구에게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나요? 힘이 듭니다. 피해자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이대로는 저도 함께 쓰러질 판이에요. 저희 재판에 동행해준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지만, 우리는 아직도 힘이 듭니다.


안희정 판결처럼 사법부가 반성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동의 없는 성관계를 성폭력으로 규정하도록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성폭력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재판이 끝났지만 피해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피해사실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하는 ‘개념’이라고 하죠. 피 흘리지 않고도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더 자주 행동하고 더 긴밀하게 연결되면 좋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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