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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r 11. 2019

혐오의 태도

의도가 좋았어도 상처는 상처야.

나를 ‘어떤’ 틀에 가두려는 시도,
그 틀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
그 틀로 우리 관계를 굳히려는 시도가 싫다.    



나는 그런 시도를 혐오라고 부른다.

혐오라는 단어가 과격하다고? 이 단어를 과격하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이 단어를 선택하고 싶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을 핑계 삼았다면 여성혐오라 부른다. 내가 청년이라서 그랬다고 한다면 뭐라고 부르지? 청년혐오라고 부르면 될까? 청소년혐오인가?


좋은 의도로 한 말이라는 것 알고 있다.

그래서 좋은 의도인지 아닌지가 논외가 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라도 그 시도는 나를 불행하게 했다. 꽃으로 때려도 폭력은 폭력이야.    


그 아무리 좋은 의도였어도,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도, 나를 보호하고 싶었어도, 우리 관계의 미래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도 그것은 혐오다. 온갖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번 혐오에 대응할지 말지는 나의 선택이겠지만, 이 선택은 혼자만의 선택이 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러려면 결국엔 상대방과 공동체와 공유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매번 심판대로 불려 나간다.

나는 나를 변호해야 한다. 이게 왜 ‘피해’인지 ‘상처’인지 준비해서 설명해야 한다. 나를 변호해야 하는 이 상황이 나에게는 마치 심판 같다. 이 심판을 통해 내가 내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자 낑낑거리고 있는 것은 내 정신건강, 나와의 관계에 좋지 않다. 심판대로 불려 나가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써야 한다. 그 방법은 나만의 것이 되기를.


이렇게 누가 보면 ‘자발적’으로 심판장을 마련하는 행동, 그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에게 ‘용기 있다’, ‘용기 낸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같다. 적절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하고 부족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심판장을 여는 사람이고 심판받는 대상은 나의 피해사실이다. 억울해서 말하게 됐다는 내적 동기가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라는 말로 돌아올 것만 같다. 원한 것인가? 나는 심판을 욕망했던 것이 아니다. 자발적인가?

내가 용기를 냈는데 내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에 나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내 피해를 인정받으면 나는 기쁠까? 안도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인정’인가? 질문은 늘 같은 자리를 향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차별과 배제는 세트다.
나를 배제시키려는 시도,
의도와는 상관없이 피해는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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