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한복판에 소방차 2대가 나타났다.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는 소방차가 꽉 막힌 도로에 섬처럼 솟아 있다. 어떤 차도 멈춰 서거나 비켜주지 않았다. cgv 앞 횡단보도.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가관이다. 다들 평소처럼 길을 건넌다. 사이렌 울리는 소방차 앞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길을 건넌다.
소방차는 사이렌을 더 키웠다. 사이렌 소리는 더 크고 높아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소방차의 운전석과 보조석 창문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급하게 보조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이 다 보였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들 눈엔 저 소방차가 별로 안 급해 보이나? 혹시 저 사람들은 소방차가 불 끄러 출동하는 중이라는 걸 모르나? 어떻게 사이렌을 울리는 소방차를 코앞에 두고 저렇게까지 편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옆사람 팔짱을 끼고 어떻게 저렇게 유유자적 소방차 앞을 걸어가지? 내가 소리라도 질러야 하나? 내 작은 목소리가 이 시끄러운 곳에서 들릴까?
소방차 사이렌이 계속되자 소방차 바로 앞에 있던 외제차가 드디어 경적을 울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지 않고 길을 건넌다. 대체 다들 왜 그래? 너무 어이없는 이 시간.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어찌어찌 소방차는 횡단보도를 통과하고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곁엔 횡단보도를 건너온 사람들이 남았다. 좀 전까지 내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내 곁에서 아까처럼 유유자적 걷고 있다. 서로를 보며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까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새삼 이 세상이 무서워졌다.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같이 살고 있었구나 싶어서 소름이 끼친다. 어쩌면 이제 사람들은 본인 눈에 보이지 않는 위기, 고통, 슬픔 따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디선가 불에 타고 있는 무엇이나 누구보다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 오늘 밤엔 누굴 만나 뭘 하고 놀까 따위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혹은 개인 프로젝트나 스터디 모임이 더 중요했던 걸까? 뭔지 모르겠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아. 더 무서운 건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이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처럼 보일 거라는 점이다. 참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