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날개 펴라는 말 좀 그만해

걱정돼서 하는 말도 폭력이 될 수 있어

by 보라체

나는 종종 ‘이젠 그만 날개를 펴라’는 말을 듣는다. 스펙이 아깝다, 과거가 아깝다, 너 자신을 믿어도 된다, 너는 될 놈이다, 아직 때가 안 왔다 등등. 과거의 나는 날아다녔다. 허공에서 발을 좀 떼고 붕붕 떠다니며 하고 싶다고 믿었던 일들을 해내기 위해 가고 싶은 곳을 갔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나에게 날개가 있는지 어쩐지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다. 난 그저 땅에 발을 딛고 싶다. 나에게 날개가 있는지 어쩐지도 잘 모르겠다. 과거에 내가 날아다녔다고 해도 그게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증거는 아니잖아? 폭풍이 불었다거나, 행글라이더 같은 걸 타고 있었던 걸지도. 혹은 낙하산이었을지도.


지금의 나는 나를 꽤나 믿으면서 지내고 있다. ‘나는 어쨌거나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내 안에 있다. 아무리 못살아도 어느 정도는 살겠지- 지금 걷는 이 길도, 다음에 걷게 될 다른 길도 나는 아마도 잘 해낼 것이다. 날아서 가면 좀 빠르게 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지금은 관심 없는 교통수단이랄까. 그냥 걸어가고 싶어. 바람도 느끼고, 하늘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수다도 떨면서. 새로운 것도 해보고 익숙한 것도 즐기면서.


요즘의 나에겐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다.

근래의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아마 내 밖으로도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덕분에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내가 가진 내 두려움을 함께 볼 수 있게 됐다. 아마도 나에게 날개를 펴라고 조언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난 이 감정에 대해서 뭐라도 말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 심지어 그 감정이 바깥으로 노출되는 사람은 나약해 보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감정을 외면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다. 번거롭다. 난 나에게 ‘두려움’이 생겨서 좋다. 조금 생소하지만 반갑다. ‘두려움’이 지금의 나에게 지표면의 방향을 알려준다.


1*xxxONyLH-XMSQwMaqQMU-w.jpeg 나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은 모든 물체를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같은 것이다.


나는 내 말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이 있을까 봐 두렵다. 나에게 생긴 ‘두려움’ 덕분에 요즘의 나는 말 한마디, 모든 행동거지에 최대한 고민하고 노력할 수 있게 됐다. 무딘 나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칼을 마구 휘두를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유체 이탈해서 말도 안 되는 곳에 내 정체성을 대입하고 나를 오해하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여성을 혐오했다. 여자들끼리 하는 수다는 듣기도 싫었다. 명품백, 화장품, 카페 놀이, 사진놀이, 남자 이야기하는 모든 여성을 싫어했다. 여성들이 편을 짜서 노는 것도 싫어 혼자 다녔다. 여자들은 밥을 축내고 한심한 대화를 하는 소모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성인데도! 직장에서 상사가 여성인 경우엔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임신 막달까지 야근했다는 여성 상사를 독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멍청함을 혐오했다. 멍청한 사람은 진짜 멍청해서 도저히 '와꾸'가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저런 머리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까 오지랖을 부리며 속으론 한심해했다. 감정적인 사람을 혐오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그 일에 대해 며칠씩이나 계속 이야기하고, 글과 눈물을 한 바가지씩 생산해내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감정도 하나 추스르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건지.


그렇게 사는 동안 나는 점점 삐뚤어졌다. 나는 한 눈에도 여성으로 보였고 똑똑하지 않았으며 감정적인 사람이니까. ‘나’를 부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다. 내가 극렬하게 싫어했던 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라는 걸 하나씩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도 두려움이라는 게 생겼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감정이라 나에게 참 소중한 느낌이다. 지금도 충분히 예리하진 않다. 나에게 딱 적당한 수준? 사실 이 정도의 뾰족함도 삶에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걸. 글쎄. 내가 내 뾰족함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내 뾰족함을 받아줄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무디게 만들 수는 없다. 제겐 이제 날개가 아니라 가시가 생겼어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날개를 펴라는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적은 없었다. 보통은 설명하지 않고 성과를 만들어 설명을 대체했다. 말로 해봤자 믿어주시지 않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때로는 원하는 것을 부모님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기 위해 나는 공부했고 착하게 살았고 취직했고 돈을 벌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명글을 쓰고 있다. 요즘의 나에겐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을 해명할 성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언젠가 나는 결국 또 성과를 내게 될 것이고 그 성과는 나를 해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진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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