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커뮤니티 '트레바리' 제출용. '사랑의 기술' 독후감
7년 만입니다. 그때 전 새내기 대학생이었습니다. 사랑이 뭔지 몰라서 글로 배우려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은 '속았다'는 느낌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 20살의 저에게 이 책은 정말!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낭만적인 제목에 낭만적이지 않았던 내용이었죠. 종교와 철학, 심리학이 짙게 깔려있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도 한 군데에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사랑을 'fall in love(사랑에 빠지다)'가 아니라고 하신 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좋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전엔 사랑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롬씨 말대로라면 사랑은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옵니다. 마치 악기 연주와 비슷하죠.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아닌 '나의 부족'을 탓할 수 있는. 원망의 화살을 남에게 돌리지 않아도 되고, 그저 '운이 나빴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7년이 흘렀습니다. 적지 않은 연애를 하게 됐습니다. 프롬씨 덕분일까요. 저에게 사랑은 꽤 중요한 가치가 됐습니다. 어떤 향수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맡았던 봄 냄새가 더 또렷합니다. 어떤 풍경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봤던 밤바다가 더 또렷합니다. '잘했다'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늘 최선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운도 좋았습니다.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프롬씨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엔 모두 헤어졌어도, 후유증을 심하게 겪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감정만이 아닌 결의이자 판단, 약속"이라고 한 프롬씨의 말에 귀 기울인 덕분인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가 적었습니다.
7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좋았던 문장은 여전히 좋고,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적으로 성숙해지진 않았나 봅니다. 오히려 불만만 늘었습니다. 모성애에 너무 많은 환상을 갖고 계신 건 아닙니까? '동성애적 일탈', '남성적/여성적 요소' 어쩌고 하실 땐 정말 책을 덮고 싶었습니다. 약 45년 전에 쓰신 책이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하고 읽었습니다만.
잠시 샛길로 빠졌지만, 다시 본론을 얘기해볼까요. 이번엔 다른 문장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래 문장을 형광펜으로 칠했습니다.
"사랑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사실 조금 전, 거짓말을 하나 했습니다. "후회가 적었다"는 거짓말입니다. 저는 늘 아팠습니다. 헤어지고 나면, 그제야 저의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취업과 직장을 핑계로 상대방에게 소홀히 했던 건 아닌지, 혼자 갖고 있던 불만을 직접 말하는 대신 괜히 화풀이한 건 아닌지. 흔하고 뻔한 이야기입니다만, 저에겐 자국이 깊게 파였습니다. 결국 혼자서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는 말에 위로를 받은 이유입니다. 설사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니더라도, 사랑엔 여전히 거대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다. 참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과 세계와 삶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의 확장'과도 비슷한 말로 여겨집니다. 마음에 듭니다. 7년 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더 맞는 사람'을 찾으려 애쓰는 대신, 제 '태도'를 가꾸겠습니다. 작가 임경선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상을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살아가야지요.
"나는 너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을 알게 되리라."
작가 윤대녕씨의 문장입니다. 당시 그가 짝사랑했던 누나에게 준 편지엔 저렇게 딱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프롬씨도 좋아할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당신이 생애 마지막으로 사랑한 것으로 알려진 '애니스 프리먼'씨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 편지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