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쓰고 싶다. '좋은'이 뜻하는 형용사의 폭은 무척 넓다. 정해져 있지 않아서 오히려 매력적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도 재밌다. 이왕이면 '좋은'의 범위 안에서 글을 쓰며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돈도 벌었으면 좋겠다. 역시 시인, 작가보다는 기자가 떠오른다. 사명감이나 저널리즘 의식은 그다지 없다. 필요하다면 갖추겠지만 없어도 된다면 굳이 의식하고 싶지 않다. 이기적 이게도 사명감에 내가 망가질까 봐 두렵다. 내가 행복하자고 쓰는 글인데 그 지경까지 가고 싶진 않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환경이라면 기자도 되고 싶지 않다. 사명감 없이 버틸 수 있을지 우려도 되지만 일단은 괜찮다. 매일은 성실하게, 인생은 되는대로 살면 된다. 어떻게든 흘러가도 되는 게 인생이다. 인생은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도 인생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언제나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다. 늘 흘러가고 있는 강과 같다. 조급하지 않아도 강은 흘러간다. 어디에 종착할지는 내가 신경 써서 될 일도 아니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오래갈 수 있도록 흐름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과 언젠가 다다를 종착점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중요하다. 어디서든 적응하기 마련이고 만족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지금은 좋은 글을 쓰며 그저 되는대로 흘러가고 싶다. 불확실한 이성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 '좋은' 글에 집중하는 게 낫다.
문장력이 뛰어난 글이 결코 좋은 글은 아니다. 문장은 결국 취향이고 정답은 없다. 계속 읽고 싶게 할 수는 있으나 머무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릇이 아무리 이뻐봤자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 담고 있는 생각이 맛있는 글이 계속 읽힌다. 책을 읽는 건 생각을 맛있게 하는 데 제격이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려 소화가 오래 걸리는 만큼 내 안에 오래 머무른다. 그동안 타인의 세계를 느린 호흡으로 경험하니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집착하는 게 있다면 자주, 더 많이 읽으려 노력한다.
솔직한 글은 좋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솔직해야 누군가 나를 기억할 수 있다. 글로써 나를 드러내는 건 꽤 부담도 있지만 필요한 덕목이다. 솔직함의 방향이 인간 본능의 배설이 되어선 안 된다.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더욱 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게 맞다. 문명과 더불어 사는 사회의 덕목이다. 당당함 대신 부끄러운 자기고백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재의 지향점이 곧 솔직함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솔직함은 언제나 그럴싸한 사유가 동반된다. 내가 한남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유는 그렇게 이루어진 솔직함이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글도 좋다고 할 수 있겠다.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한 소재는 누구나 좋아할 정도로 뻔하다. 환경, 인권, 민주주의는 쉽게 떠오른다. 그래도 사회가 이 모양인 건 사람들이 복잡하게 나쁘기 때문이다. 단순히 악한 게 아니라 자신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그렇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간통 미수 고백 자살 소설이다.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이보다 낭만적이고 순수한 소설을 알지 못한다.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여유를 만들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 읽히는 건 그다음의 문제다. 쓰는 사람의 몫은 아니다.
글을 쓸 때 몰입은 경계하고 싶다. 일단은 내가 행복하자고 쓰는 글인데 그러지 못할 경우엔 한계를 인식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몰입하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까지 욕심을 부리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은 넘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잘것없는 나의 분별이지만 일이 될 대로 되어가게 운수에 맡기는 건 자신 있다. 악플이든 비평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이 정도의 태도가 적당하다. 너무 복잡하게 살 필요는 없다. 내 글의 부족한 점만 겸손히 배우면 된다.
좋은 글을 쓰자. 재밌게 말하는 재주는 없으니 무미건조하고 진지하더라도 사회에 필요한 글을 쓰자. 순박함과 진솔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글을 쓰자. 어중간한 재능을 갖춘 탓에 슬픔이 특수한 권위로 나를 지배하더라도 좋은 글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