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린 단상

외손주가 올립니다

by 유연

당신 없는 첫 추석입니다. 올해 1월 23일, 유난히 추웠던 올해 겨울에 죽은 당신 탓이 큽니다. 성묘를 다녀왔더니 다행히 자리가 참 예쁩니다. 당신을 닮았어요. 햇살이 묘비를 꼼꼼하게 데우니 그리워하기 알맞습니다. 덕분에 속으로 삭인 울음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이기적이지만, 남아있는 저희는 여기가 꽤 마음에 듭니다. 머물기 적당한 까닭입니다. 백일홍은 가을이 저물 무렵에도 폈는데, 당신은 저희 곁을 빨리도 떠났네요.


점심과 저녁 사이에 왔습니다. 시간대가 애매하죠. 막힐 듯한 차를 피하느라 아들이 그러자 했답니다. 유난을 떠느라 대신 배를 곪고 왔어요. 여기 있지 말고 빨리 가서 저녁 먹으라고 성내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평소에도 당신은 외손주 지겹겠다고 빨리 집에 가라 했었죠. 늘 저를 비껴갔던 잔소리에 철없이 굴었던 제가 자주 원망스럽습니다.


음식을 많이도 해왔습니다. 육전에, 나물에, 송편까지 고생했을 게 눈에 선합니다. 좋아했던 배는 심지어 테이프도 뜯지 않고, 상자째로 가지고 왔네요. 오는 길에 대충 산 꽃 한송이에 죄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당신은 오늘도 솔직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먹냐, 괜히 했다.' 하고 괜스레 타박하네요. 좀 잡수시지도 않고, 당신은 눈앞의 음식을 돌려보냅니다. 어느덧 당신과 키가 비슷해진 손자. 손녀가 신났습니다. 대신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묘비 옆에 놔둔 국화는 겨우 5000원짜리 조화인데 당신은 왜 괜한 돈 썼냐며 타박합니다. 저희한테 아낄 줄 몰랐던 당신은, 정작 자신에겐 몹시 아꼈습니다.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저희의 옷은 그럴싸하게 자주 바뀌었는데, 당신의 옷은 그대로였습니다. 혼자서 옷을 입을 줄 모르는 저희는, 당신의 허전함이 너무나 어색하고 야속합니다.


아들이 명당 잡느라 고생 좀 했나 봅니다. 공기도 좋고 트인 곳에, 화장실도 가까운 덕분에 당신을 찾기 쉽네요. 급하게도 가버린 탓에, 정관을 세 번이나 왔다고 이쁘게 생색을 내는데 봐줄 만 합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겨우 한 달 반을 버티셨죠. 호스피스에서 용변을 받기도 전에 깔끔하게 가버리셨으니 병고가 덜했습니다. 남겨질 가족에게 짐을 싣지도 않으셨습니다. 과연 급했던 성격 그대로입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외손주는 염치없지만 글이나 쉬이 씁니다. 간암을 너무 늦게 알아챘지만, 말을 잘 못하는 저는 가벼운 펜을 놀렸습니다. 감사하다는 편지를 썼더니 '알면 됐다' 한 마디 하셨죠. '세연이 왔나~' 하면서 항상 웃으셨죠. 한 번이라도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죽는 와중에 서울에 있던 외손주를 찾으셨다면서요. 부산 가던 ktx가 아득하게도 느렸습니다. 당신보다 항상 느렸던 저는 자주 한스럽습니다.


양정 댁에 오고 갈 무렵엔 항상 베란다에 서 계셨죠. 아픈 다리를 이끈 덕에, 당신을 만나던 처음과 끝은 언제나 한 발자국 앞이었습니다. 백내장 탓에 잘 보이지도 않았을 눈으로 저희가 주차할 곳은 어찌 그리 잘 찾아서 알려주셨는지요. 눈빛으로, 발걸음으로 살피던 '마중'과 '배웅'은 당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영원히 그럴 줄 알았던 것이 어리석었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은 아파트 베란다입니다. 처음으로 손 흔들지 못했던 당신의 서글픔이 참으로 허전했습니다.


들을 수 없는데도, 저희는 꽤 자주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꿈에서 봐서 그런 걸 까요. 당신은 왜 여전히 웃기만 하는지 모르겠네요. 로또 번호나 가르쳐주시지, 기억 속에 참 선하게 자리 잡으셨나 봅니다. 애 많이 썼고, 혼자서도 십수년간 남매를 공들여 키웠죠.


동사무소에 갔더니 지문이 없었다면서요. 어떻게 사신거에요. 해줄 수 있는 일은 정말 다 하셨군요. 지독스레 고생하셨을 텐데 왜 당신의 삶을 한 마디도 이야기 안 하신 거예요. 왜 저희에게 물어만 보신 거계요. 왜 듣기만 하신 거예요. 좀 자랑하시지 않고, 어쩌면 그렇게 다 퍼주기만 할 수 있던 걸까요.


당신의 김 씨 딸과 아들은 여전합니다. 자주 우네요. 딸은 교회에 가려 하고. 아들은 술을 마시네요. 문득 생각날 때가 많나 봐요. 옆에 있는 사위와 며느리가 곤란할 때가 많을 수밖에요. 딸은 당신과 자주 가던 현대백화점 범일점을 갈 수 없대요. 참 못났죠. 당신 없이 잘 살아야 하는데, 저희는 그럴 수가 없네요. 저도 가끔 웁니다. 왠지 모르겠어요. 자연스레, 당신이 생각나요. 일부러 사진을 다 지웠는데 눈에 떠오릅니다. 새벽 5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신을 그리워하게 만든 새벽을 원망합니다.


외할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라는 사람 한 점을 온전히 그리워합니다. 저의 도화지에 그려진 당신의 색깔이 선명합니다. 정작 당신에게는 마땅한 색을 못 남긴 제가 한스럽습니다. 저는 항상 바보같이 느립니다. 시야는 좁고, 발은 자주 헛디딥니다. 여전히 느린 외손주는 죄스러운 마음에 글이라도 올립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술을 꽤 마신 탓에 토하며 글을 쓰니 해는 뜨는데, 끝내 말하지 못했던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려 잠들지 못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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