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씨의 단편 소설집 <카스테라> 中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는 기린이 된 아버지가 나온다. 목이 길어진 덕분에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일상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자신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니라 기린임을 선언한다.
나는 한남이다. 단순히 '한국남자'의 줄임말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혐오적 의미를 인정한다. 한국남성은 부끄럽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에 따르면 남성은 선하게 살아가도 필연적으로 유리한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에게 고통을 준다. 묵인한다면 여전히 남성 중심적 사회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셀 수 없는 한국 불법 촬영 동영상이 여전히 소비되고 있다. 남성들로 이루어진 단톡방에서 '맘충'과 '김치녀', '오크녀'는 일상 다반사다. 여성을 향한 외모품평도 한낱 유희로 소비되고 있다. 남성이 일상의 언어와 행동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롭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여성과 비교하여 살아온 배경이 유리해서 젠더 감수성이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부족한 젠더 감수성 탓에 여성이 고함치기 전까지 몰랐던 게 많다. 여성혐오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단어들이다. '자궁'이 아니라 '포궁', '처가'가 아니라 '처댁',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다. '유관순 누나'는 숱하게 들어왔지만 '유관순 언니'는 어색하다.
한남이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다른 단어들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든다. 씁쓸하고 부끄럽다. 도망치고 싶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사실 도망치는 게 편하다. 페미니즘을 외면해도 남성은 여전히 강자다. 취업 및 승진 차별을 겪을 일도 없고 가사노동도 안 하던 대로 안 하면 된다. 데이트 폭력이나 염산테러를 당할 일도 없다.
나를 포함한 남성은 도망가고 싶을 테지만 한남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이다. 단순히 혐오적 표현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여성이 왜 그런 표현을 쓰는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다각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분명 김치녀와는 다른 이유로 쓰이고 있다. 한남이라고 할 때 남성이 바라볼 수 있는 여성 인권의 현주소는 적나라하다. 미러링은 지금도 꽤 유효한 수단이다. 남성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다가 반대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몰랐던 것을 알게 됐다.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덕에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느끼게 됐다.
한남임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당장 내 옆의 여성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 혼자 온전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휘둘리고, 정체성을 송두리째 뽑힌다. 일상에서 위협받고, 공격받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그 고요 속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책임감을 느낀다.
페미니즘을 지향하지만 페미니스트 대신 한남이라고 선언한다. 페미니스트라기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페미니스트라고 할 때의 무게감도 여성이 남성보다 무겁다. 남성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호기심, 혹은 선망의 시선을 받는다. 반면, 여성은 노트북에 페미니스트 스티커를 붙이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염산테러나 여성 혐오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서글픈 사회다.
기린처럼 긴 목을 뻗어 일상의 시선을 벗어나야 한다. 여성혐오는 우리의 일상이다. 남성이 여성혐오를 벗어나는 첫걸음은 자신조차 한남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한남이라는 단어가 튀기는 작은 파편에 위대한 역동을 늦춰서는 안 된다. 엄청난 변화는 긴 역사 끝에 이제 겨우 시작됐다. 지금은 작은 파열음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 공존을 배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