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 땐 로봇이 아니라 커다란 곰 인형을 생일선물로 받았다. 게임과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고 술집보다는 카페가 좋다. 요리와 설거지, 청소 같은 집안일도 자취를 해보니까 꽤 재밌다. 누군가와 싸운 적도 거의 없고 말하기보다는 주로 듣는다.
'여성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특징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나'라는 개체의 특성을 압도하는 보편이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왜 겨우 두 가지 성별에 의해서만 수많은 사람의 성격이 규정되는지 궁금했다. 내가 가진 수많은 속성은 '여성적'이라는 말 하나에 귀결되기에는 아깝기 때문이다.
‘여성적’이라는 말은 만들어졌다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었다. 남녀 간 의사소통을 개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유용한 책이었다.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고 실제에 적용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책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화성과 금성의 거리로 비유했다. 자그마치 1억 3천만 Km다. 누가, 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보편적인 차이를 만들고 강요했을까.
시대와 국가, 문화에 따라 보이는 남녀의 양상은 몹시 다르다. '여성적'이라는 말이 보편타당하다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바흐오펜은 '아마조네스 신화'를 근거로 모권제 사회의 존립을 주장했다. 신화의 실재 여부는 이견이 있지만, 소아시아 북동쪽에 전투적 여성과 여왕이 있었다는 점은 일리가 있다. 우리나라도 고구려 때 서옥제가 있었다. 제도적 기반이 모계제 사회였으니 당시와 지금의 '여성적'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척 달랐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을 만들었다
성별에 관한 특징은 환경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우리는 타의에 의해 태어나서 길러졌고 누구도 그 영향력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몬 드 보부와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라는 명문을 남겼다. 의식하든 못하든 타인에 의해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여성을 만드는 주체는 남성이자 지배자, 절대자다. 실제로 역사상 위대한 성취를 이룬 위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절대적으로 긴 세월 동안 전쟁의 지배자, 혁명가, 정치가는 모두 남성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00년 전에 여성들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두고 주체로서 살기를 당부했다.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일 년에 오백 파운드의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면 문학사와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여성은 평균 13명의 아이를 낳고 가사를 전담했으며 1882년까지 사유재산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이 바라본 열등한 여성에 대한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 동안 여성은 반박은커녕 자신조차 능동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환경이었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배경에서 존재했다. 역사상 여성의 존재가치는 훌륭한 남성을 기른 어머니, 아내로만 기능했다. 우리나라 최고액 화폐의 모델인 신사임당도 유시민 씨가 알쓸신잡에서 지적했듯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모습만 부각 받았다. 바버라 부시의 부고 당시 국내 언론은 여성이라는 인간 자체를 다루지 않고 성공한 남성의 아내 혹은 어머니로서 축소해서 보도했다. 이러한 사회의 문제는 흥행 중인 SBS의 <미운 우리 새끼>에서도 드러난다. 자극적인 행각을 벌이지만 미숙한 아들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면죄하고 모성애를 강조한다.
남성은 유리한 상황을 지속하기 위해 문학과 정치, 경제 등 모든 사회적 기반에서 여성을 배제했다. 그러했기에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여성은 홀로 서지 못했다. 남성이 바라본 여성은 모순적이고 열등하고 감성적이었다. 모성애가 강했고 자신을 치장해야 했다. 남성에게 사랑받을 때 가치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사랑받을 때 천사로서 남성을 구제했지만 사랑받지 못할 때는 질투에 눈먼 악마로 그려졌다.
'여성적'이라는 말은 남성이 만들었다. 남성이 여성을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적'이기를 강요했다. 성별의 틀에 개인을 집어넣어 획일화하고 재생산했다. 교육을 통해 우리의 윗세대로부터 이어졌다. 수많은 문학 고전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받는 뮤즈, 혹은 사랑받지 못해서 이중적이고 혼란스러운 존재로 그려졌다. 수동적인 공주님과 백마 탄 왕자님이 나오는 동화도 마찬가지다. 이는 분명히 우리가 길러질 때 막대한 영향을 줬다. 영문학자 마리 루티는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진화심리학적 편견을 거부했다. 여성은 타고난 것보다도 여성적으로 길러졌다.
남성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나를 포함한 뭇 남성은 페미니즘이 억울할 수 있다. 과거의 남성이 해왔던 것에 대해 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가. 힘들게 군대도 갔다 왔고 N포 세대라는데 남성이 기득권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토니 포터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성 역시 맨 박스에 갇혀서 '남성다움'을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필자가 지적했듯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없어질 때 남성에 대한 틀도 없어질 것이다. 여성을 향한 남성의 타자화와 약자화가 없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옭아맨 남성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남성이 해왔던 만행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느낀다. 이대로 묵인한다면 공동의 파이를 넓히기는커녕 여전히 여성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것이다. 취업차별, 유리천장과 경력단절뿐만이 아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사법부의 역할도 문제다. 강제 성관계의 기준에 정조와 피해자 다움이 들어가는, 철저히 남성이 유리한 사회를 살고 있다. 기득권임을 인지하고 나의 영향력을 선하게 사용하고 싶다.
'나'라는 특별한 개인이 삶에서 주체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별에 속하고 싶지 않다. 결국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사람이다. 여성적이라는 말을 남성이 만들었음을 인지한다. 여성적뿐만 아니라 남성적이라는 말도 거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향력을 가진 남성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고백한다. 지금도 여성단체는 고요속에서 고함치고 있다. 단편적인 선입견에 휩싸여 거부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반성과 책임, 연대가 공존을 위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