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수 없다. 위선이다. 페미니즘을 지향하지만, 남성인 나는 너무나 부족한 탓에 결코 페미니스트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여성의 삶에 대해 알긴 뭘 안다고 글을 쓰는 걸까. 역사상 남성이 기득권이었다고 입증하는 글, 워마드가 우리 사회에 유효하다는 글, 내가 한남임을 선언하는 글을 내키는 대로 휘갈겼다. 여성이 수없이 외쳐왔던 당연한 말을 성별만 바꿔 남성의 언어로 지껄였다. 글이 쉬이 써졌던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니 강자의 언어가 되었고, 쓰기 쉬웠고, 잘난 체가 되었고, 오만했고, 아둔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타인의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깨달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그만큼 아파한 적이 없다는 건 나를 더없이 괴롭게 했다. 불법 촬영 동영상에 관해 여성이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할 때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여자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딸을 지키려고 몰래카메라가 있을 법한 곳을 자신의 몸으로 가린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애끊는 심정 앞에서 나는 방관자였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울지 못했다. 당시 의무경찰로서 근무했고 나의 철근 같던 방패는 통곡하던 그들을 향했었다. 내가 건네는 위로는 분진과 같았다. 건들바람 불면 날아갈 하찮은 무게. 고작 그 정도로 무거운 척하며, 위선을 떨며, 내가 편해지자고, 최소한의 알량한 양심만 지켰다.
스쳐 가는 바람에 괴롭다. 나의 치부를 이해하니 글의 행간 사이에 부유하는 것이 부끄럽다. 발을 무심코 내딛다 삐어버린 탓에 배착거리고 있다. 오만의 대가는 크다. 글은 고쳐도 생각의 흔적이 남는다. 내가 뭐라고 펜을 놀리는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성 옆에서 그저 돕고, 응원하고,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한 상처를 받은 여성에게 내가 그 고통을 아는 척 해봤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의 상처를 옅게 할 수 없다. 나의 자기만족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낸 목소리는 그들의 상처를 도리어 후벼파고, 타고난 생물학적 성에 대한 통탄만을 느끼게 했다. 나의 모자란 글은 그 앞으로 나아간 적이, 그럴 일이 결코 없다.
나는 위선적이다. 본능에 사로잡힐 때가 많고 젠더 감수성과 공감 능력은 현저히 부족하다. 듣고 읽으며 공부하지만, 이해하는 척할 뿐이다. 슬픔에 대한 한계를 느낀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위선자. 냉담한 타인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주로 받는 시선은 증오와 의심. 그럴만하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나, 나는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문유석 씨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을 다시 읽으며 삔 발목에 별 효험 없는 파스를 뿌린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염치없게도 쓸 수 없는 글을 쓴다. 위선으로 시작하여 선비질을 한다. 무의식중의 습관이 될 때까지 희망을 불씨로 삼자. 남성이라서 살아남았고, 남성이라서 내가 썼던 페미니즘 글에 대한 백래시가 없었다. 기껏해야 들어본 욕은 ‘말도 안 된다’, '생각이 특이하다' 정도. 페미니즘과 관련한 타인의 생각을 바꾸진 힘들겠지만, 1초만이라도 여성의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가진 영향력을 선하게 쓰기 위해 단칸방에서 쓸 수 없는 글을 쓴다. 상처받은 이에게 보잘 것 없는 손을 내민다.
배착거릴지라도, 걸어야 한다.
위선적이라 할지라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