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는 이제 합당하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수는 버리는 게 낫다. '순수하다'라고 하면 어쩐지 바보라는 욕을 돌려 말하는 것 같다. 순수한 사람은 미덕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대신,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순수의 고결한 지위는 다른 단어들이 다 가져갔다. 충성, 우직, 정직 같은 단어들이 순수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꽤 욕심을 부렸다.
기괴하게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수가 독점적인 행세를 할 때가 있다. 피해자에게 가는 화살은 항상 순수를 등에 업고 있다. 우리 사회는 왜 피해자에게 잔혹한 순수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그랬고, 미투 폭로자에게도 그랬다. 세월호 유가족이 배상금을 얼마를 받든, 심지어 항소하든 사건과 관계없다. 미투 운동 폭로자의 피부가 탔든, 해외여행을 갔다 왔든 사건과 관계없다. 그래도 된다. 사회의 시선은 피해자의 순수성을 따질 게 아니라 그들의 상처를, 개인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크나큰 용기를 봐야 한다.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에는 더 가관이다. 300년 전에 죽은 정조까지 끄집어낸다. 여성의 평소 행실은 왜 따지는 걸까. 꽃뱀 이데올로기는 왜 생겨났을까. 이는 순수해야 하는 여성에게 속았다고 말하는, 남성의 추악한 분노다. 여성이 순수했다면,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몰랐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왜 목소리를 냈냐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순수를 따지는 행위는 결국 침묵을 바란다는 추한 심리가 숨어있다. 순수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걸까.
여성은 지금까지 대체로 순수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아름답다고 이름 붙여진 여성의 순수는 지독했다. 코르셋은 여성의 자기만족이 아니라 남성이 강요한 순수였다. 코르셋과 전족, 가채는 여성을 가혹하게 옭아맸다. 중세 유럽 여성은 인체 오장육부에 가해지는 40kg의 압박을 일상에서 견뎠다. 송나라 이후 천 년간 중국 여성은 9.9cm의 발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조선시대에는 9살 여자아이의 머리 위에 15kg의 가채를 올려 목이 부러져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제야 영조가 나서 가채를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여성의 순수는 죽어서야 끝이 난다. 지금도 코르셋은 화장, 옷차림, 각종 장신구 등으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의 책임 역시 크다. 지금도 피해자의 순수를 따지며 대중에게 판을 깔아주고, 장사하고 있다. K 씨의 폭행 연루 사건에 수백 건의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사건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도 못하는 CCTV가 공개됐고 폭로전을 부추기고 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K 씨의 과거사를 파헤쳤다. K 씨가 동거를 하든, 싸움을 잘하든, 약을 복용했든 사건과 무슨 상관인가. K 씨와 남자친구 A 씨의 진술이 상반된다. 알려진 것이 극히 제한적임에도 대중은 사건과 관계없는 여성의 순수를 검열한다.
K 씨는 카톡을 공개했고, 디스패치에서 인터뷰까지 했다. 다시 활동하지 않을 각오로 세상과 맞서고 있다. 20대 여성은 연애도 하고, 다투기도 하며, 실수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 성실히 조사를 받고 결과에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K 씨가 사생활까지 다 털어놓아야 할 정도로 잔혹하게 순수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여성은, 특히 피해자는 순수할 필요도 없고 순수해서도 안 된다. 이기적이어도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받은 상처는 순수라는 미명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은 없다. 1866년에 도스토옙스키가 쓴 <죄와 벌>에서 순수한 여성 소냐는 남성을 구원한다. 사회는 왜 아직도 ‘순수한 소냐’에 대한 이기적인 환상을 버리지 못했는가. 150년이 지났다. 가채를 쓴 이름 모를 9살 여자아이와 소냐는 죽었다. 추잡한 순수를 사회가 죽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