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여성의 삶을 반영하는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가 인기다. 작년 5월부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연재됐으며, 30일 기준 각각의 팔로워는 19만, 40만 명이 넘는다. '2017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되면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췄다. 지난 1월에는 '귤프레스'를 통해 독립출판되어 세상에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알리고 있다. 비판적 사실주의로써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혐오를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그렸다.
주인공 민사린과 무구영은 대학 동기다. 졸업 후 우연히 다시 만나 연인이 되었고 결혼했다. 사린이는 아내가 되었고 구영이는 남편이 되었다. 동시에 사린이가 며느리가 되고 구영이가 사위가 되면서 두 단어의 무게감은 극단으로 치우쳤다. 300년간 이어진 시집살이의 잔재일까. 사린이는 곧 시댁 식구이자 며느라기가 되었다. 한 번도 자신의 정체성을 좋은 며느리로 정의한 적 없었던 사린이는 왜 스스로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어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며느라기>에 나오는 시댁의 모습은 일반적이다. 아니, 오히려 작가의 말대로 대한민국 상위를 웃돈다. 독자가 '우리 시댁은 이 정도는 아니겠지',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며 외면할 수 없도록 지독한 현실보다 의도적으로 더 나은 일상을 구성했다. 잘못된 것 같지만 문제를 제기하기엔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 말하기 모호한 상황이 작품에 많다. 예민함 앞에서 화내고, 공감하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수신지 작가는 만들고 있다.
여성의 현실폭로형 웹툰에서 무덤덤한 반응은 찾아볼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공감은 곧 적극성을 띠고 '이혼해라', 혹은 '구영이를 죽여라' 라는 댓글도 많다. 이에 따라 대개의 반응은 너무 과격하다는 식이다. 페미니즘을 악용하지 말라면서 자신에게도 내세우지 못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미러링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받는다. 여성이 집단살인이라도 한 것마냥 호들갑을 떤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누군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저항하라는 것은 남성 위주의 잔인한 검열이자 결국 포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며느라기>는 독자에게 일종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은 결혼을 하면 누구나 사린이가 될 수 있고 구영이를 만날 수 있다. 누구나 겪을 평범한 불행이 눈앞에 보이는데, 나 혼자만의 변화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성을 찾고 논리적으로 대처하라는 반응은 여성의 절박함 앞에서 타당하지 않다. 남성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구영이는 아주 평범하고 준수한 인물이니 공포감은 당연하다. 오히려 비혼을 지향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불행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처세다. 통계상으로 보나, 경험적 진술로 확인하나 명백하다. 남성이 자초한 결과다.
소수의 목소리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침묵은 강자에게나 유리하다. 사회가 그대로라면, 억압받는 구조에서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받고, 가해자는 남 일이므로 여전히 잘 산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소수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커진다. 수십만 시간을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봤자 듣질 않으니 회초리라도 들어야 한다. 칼을 빼 들더라도 정당성은 잃을지언정, 가치는 상실하지 않는다. 사회는 '칼을 빼 들었으니 잘못이다' 하기 이전에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를 들어야 한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전지전능하고 인간 초월적인 사회운동은 없다. 삐걱대고, 때로는 실수도 하지만 그 가치까지 폄훼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마찰음에도 위대한 바퀴는 굴러가야 한다.
구영이는 사회가 죽여야 한다. 구영이를 죽이라는 목소리는 사회에 유효하다. 요즘 이런 집이 어디에나 있다. 구영이가 없어지면 구영이를 죽이라는 목소리도 없어진다. 미러링은 필연적으로 소멸적인 과격함이다. 대상이 없으면 반대선 상에 위치한 거울도 없어진다. 대상이 없어지기 전에 거울을 부숴버리면 비추는 대상은 멀쩡히 존재한다. 대상을 비출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구영이를 죽이라는 목소리는 꽤 오랜 기간, 유효할 것이다. 과격함이 함축하고 있는 가치를 들어야 한다. 듣는 이는 귀가 있으면 들어야 하고, 필요한 말을 하는 이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