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가 역대 대한민국 음악영화 흥행 1위에 등극했다. 지난해 10월 31일에 개봉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일일 평균 관객이 늘어나더니 결국 '싱 어롱' 관람까지 등장시키며 장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의 중심인 퀸의 음악은 국내에서 8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시절 성장기를 보낸 4050 세대가 퀸에게 끌린 것은 자연스럽지만, 2030 관객이 4050 관객보다 많았다는 점은 독특하다. CF나 영화의 삽입곡으로 퀸의 음악이 꾸준히 활용된 덕분이지 싶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상업영화이지만 실존 인물을 다뤘기 때문에 전기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가 20세기 대중문화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함께 지닌다. 전기 영화에서 상업성과 인물의 역사성은 동행한다. 상업성이 역사성을 헤치거나, 역사성이 상업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공존하지만 균형을 잡아내는 건 감독의 숙명으로 여겨진다. '적당한 수준'의 포트폴리오를 갖춘다면 픽션도 대체로 용인되기 때문이다.
감독의 숙명이 역사성과 상업성을 잘 버무리는 것이라면, 관객의 숙명은 영화가 '적당한 수준'을 갖췄는지 판가름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영화는 대중예술이기에 결국 작품은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형태로 연이어 창작되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260만 명의 손익분기점을 넘어 9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이는 자본의 용어다.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성을 잃어버렸는지, 영화에 마땅한 가치를 담아냈는지는 별개의 과업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영화에서 배우 말렉은 프레디를 완벽히 재현했다. 작은 고갯짓과 과장된 손짓, 불안한 눈빛으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지 못했다. 실제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거리감을 부여했다. 프레디의 성적 정체성을 서툴게 다뤄서 특정 성적 지향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선, 프레디라는 캐릭터의 설정 근거가 몹시 빈약하고 단순하다. 영화에서 프레디는 그의 배경에 관한 질문을 싫어한다. 본명인 파로크로 불리길 거부하며, 자신이 어떤 민족인지도 밝히지 않는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죄책감과 인정 욕구를 자극하는 주변적 인물로서만 기능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실제 프레디는 아시아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를 고민하지 않았다. 프레디의 심리를 픽션으로만 가볍게 치부하고 복잡한 역학을 위한 공간도 남겨두지 않았다.
서사 역시 헐겁다. 메리와의 참사랑 구도만을 지배적으로 끌고왔다. 덕분에 프레디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은 모두 지워졌다. 매니저 폴과의 감정선은 불분명하고 갑작스럽다. 프레디의 성적 지향이 무색할 정도로 남성들과의 관계는 모두 악연으로 처리됐다. 프레디의 깨달음 순간 역시 메리에 의해 몹시 짧게 이루어진다. 연인이었던 허튼과의 관계는 고작 몇 분으로 요약된다. 에이즈의 진단 또한 사실 관계를 어그러뜨러 가며 한낱 소재로 소비될 뿐이다.
'싱 어롱' 관람의 등장은 결국 영화의 압축적인 신화화를 시사한다. 퀸의 전설적인 무대를 압축했고 그 외 영화의 장치들은 무대를 돋보이기 위해서 기능한다. 무수한 관중을 훑는 오버헤드 샷, 바삐 움직이는 뮤지선들, 무대 위를 오가는 수많은 카메라, 빗발치는 라이브 에이드 후원 전화까지.
<보헤미안 랩소디>와 <보니앤클라이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보니앤클라이드>는 경계에 선 인물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보니앤클라이드>는 지금도 회자되는 미국의 전설적인 범죄 커플을 소재로 한 영화다. 극 중 인물들은 1930년대 텍사스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렸고 사랑에 빠졌다. 약 2년에 걸쳐 미 중부 일대를 휘저으며 은행과 주유소 등을 털었다. 강도와 살인행각을 벌였던 그들은 흉악한 범죄자였지만 역설적으로 당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92년에 개봉한 영화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조명했다. 각색된 부분도 그들의 정체성을 크게 헤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잠복한 경찰에 의해 무차별 총탄을 맞고 숨진 부분까지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 영화를 본 관객은 1930년의 대중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응원했다. 1930년대 들이닥친 대공황의 분위기를 이해했고 벼랑 끝에 몰린 젊은이들의 심정에 공감했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기존 질서에 저항했다는 지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 역시 20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역사적 인물이다. 영화는 퀸의 히트곡들을 다 사용했다. 밴드 멤버들의 경험과 삶도 장황하게 녹아냈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디라는 인물을 놓쳤다. 게이/바이 프레디가 여성과 만나고 사귀는 것은 보여주지만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상업성을 헤칠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한 의도가 다분하다. 음악에 대한 그의 절박함, 그에게 영향을 미친 수많은 인물들, 성적-민족적 정체성을 향한 그의 심정은 영화에서 몹시 가볍게 다뤄진다.
프레디 머큐리와 그레고르 잠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는 잠에서 깨어났더니 흉측한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나온다. 그레고르는 육체적으로는 벌레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프레디와 마찬가지로 경계에 선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레고르는 한쪽에 속해있지 않은 덕분에 편향되어 있지도 않았다.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가족이란 공동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저 따뜻하기만 한 집단이 아니라는 걸 간파해냈다.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두 세계를 객관적으로 직면했다.
개인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정말로 불편한 지점은 소소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었다. 어쨌든 록 음악이 위대했던 시절, '퀴어'했던 청년의 성장기를 상당한 완성도로 다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 영화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핵심 요소는 '영화 너머'에서 발견되는 인물의 해석이다. 영화의 성취는 상업적으로 달성했을지 몰라도, 전기적으로는 실패했다. 프레디에게도 분명 있었을 그레고르의 성찰이 생략됐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나에게 <보헤미안 랩소디>는 부분적으로는 성취이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좌절이었다. 따지자면 좌절이 성취보다 크다. 영화를 본 관객의 기억에 남는 건 몇 가지 조각 정도일 것이다. 감독에 의해 어그러뜨러진 프레디의 기교와 어디선가 들어봤던 노래의 정체, 그랬구나 하고 막연히 다가온 퀸의 성공.
다시 얘기하자면, 영화는 상업성이 기본값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물의 전기와 역사성이 영화에 들어간다면 감독은 이때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 너머'에서 인물의 맥락까지 담아내지 못했다. 낭만적인 성취로 이 영화를 미워할 수 없는 관객도 많겠지만, 감독이라면 실재 인물과 존재 앞에서 충분히 무거워져야 하지 않을까. 브라이언 싱어가 영화에서 담은 무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