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고백록

다정한 자국에 달이 참 아름답네요

by 유연

이십대의 중간이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정의로운 때 임을 되새긴다. 고작 이 정도인가 한심스러운 순간도 많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것을 잃어가지 않을까 싶다. 가진 것과 책임의 무게가 커질수록 내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고집과 신념의 두께는 가벼워질 것만 같다. 슬픈 일에는 슬퍼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슬픔을 이긴 채 살아간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데 , 그러지 못한 까닭에 매일 밤을 괴로이 흘려보낸다. 이십 대 너머에도 나는 나일 수 있을지, 지금의 나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3년 정도 다닌 교회를 관둔 지 반년 째다. 존재의 갈증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열심이었다. 그러나 교회를 때려치워야겠다고 깨닫는 때가 왔다.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불편함이 교회에 만연했다. 남성이 하늘이라면, 여성도 하늘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에서는 여성을 땅이라고 하고, 교회에서는 여성이 땅에서도 복 받으며 잘 지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신학과 성경은 이를 훌륭히 뒷받침 한다. 화목을 위해 복종하거나 참는 건 어째서 항상 여성이 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게 불변의 진리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도망치고 말았다.


조선일보 겨울 인턴 기자직에 떨어졌다. 자소서의 첫 문단에 페미니즘과 인권 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썼다. 면접에서 받은 첫 개인 질문은 역시 페미니즘이었다. 예상했던 터라, 답변은 꽤 잘했던 듯하다. 남성만 누려왔던 기회의 평등을 여성과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가 함께 누린다면 더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앨라이로서 남성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글을 쓴다고 했다. 남성이 무슨 성찰을 하냐고 물었던 면접관의 눈빛이 기억난다. 광화문 빌딩숲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로 나는 도망치고 말았다.


도망치지 않은 적도 있다. 지난 9월, 장난감 회사 반다이몰에서는 티슈상자 형태로 제작된 ‘몰래카메라’ 장난감을 판매했다. 몰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문구로 장난감을 홍보했다. 청와대에 청원을 올렸고 기자 선배에게 기사를 써달라고 했다. 전화도, 메일도 받지 않던 반다이는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장난감의 판매를 철회했다. 나는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특별한 삶의 전환’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교차선상에서 거의 언제나 고민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지금 맞다고 여기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애를 쓴다. 무서울 때도 많지만 성장은 고통을 동반한다고 믿는다.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좁은 경험 만으로는 할 수 없으리라 확신한다. <일상의 에로스>에서 수전 그리핀이 전해준 통찰은 늘 와닿는다. ‘연대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의 본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관계가 있다. 서로의 성장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지한다. 차갑고 불편한 세상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에게 주었던 따뜻한 말을 곱씹는 것뿐임을 깨닫고 있다. 홀로 걸으니 힘겨웠는데 연대의 원 안에서 함께 춤추니 할 만하다. 그래, 할 만하다. 오늘 밤은 너의 다정한 자국 덕분에 달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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